
관계 산문 [관계대명사의 일기]는 타인, 가족, 친구, 연인 총 4부작으로 연재할 계획이었다. 관계라는 게 하여간 그러니까. 쪼개려면 한없이 쪼갤 수 있지만, 덩어리로 두자면 저 네 가지 범주를 벗어나긴 어려우니까. 다음은 순서인데, 당초 염두했던 흐름은 가족 -> 친구 -> 연인 -> 타인이었다. 필연의 관계를 우연의 관계로 되돌려놓고 싶었다. 어떤 확실함으로부터 물러선 뒤, 아무것도 결정되지 않은 상태로 더 보기

올 여름 새로운 취미가 생겼다. 재즈 피아노이다. 첫 시간에 선생님은 자신이 연주하고 싶은 곡의 악보를 가져오라고 하셨다. 나는 Autumn Leaves를 택했다. 그나마 쉬워 보이는 악보를 찾았지만, 그렇다 해도 악보도 제대로 볼 줄 모르고 악보를 건반 위로 옮겨 치는 건 더더욱 서툴렀던 나에겐 절대 쉬울 리 없었다. 나의 뇌와 손은 굳어버린 것인가 하는 마음이 몇 달간 더 보기

1 안녕하세요. 어느새 겨울을 맞이하고 있어요. 나를 내보이고 싶던 날과 나를 내던지고 싶던 날사이에서 비가 오듯 이파리는 떨어지고 사람들이 마른 낙엽을 즈려밟고 지나가네요. 바삭거리는 소리를 들으면서, 바삭하면 바삭할수록 즐거워하면서, 멀어져갔어요. 멀어져가는 발소리를 들으며 나는 삐거덕거리는 의자에 앉아 있었어요. 이맘때쯤 거리의 바닥이 내게 들려주는 소리들은 모두 외로움과 쓸쓸함에 관한 것이라고 생각했으나, 그것은 내가 이 거리를 너무 더 보기

부쩍, 그리고 무척이나 추워졌네. 집으로 가는 길이 유난히 멀다. 잠실대교 밑으로 넓게 뻗은 한강을 지나, 최고속도를 60에서 70으로 상향한 안내판을 지나, 나 역시 조금 더 달려보자는 다짐을 지나, 서울에서 경기로 넘어가는 알 수 없는 지점을 지나, 비슷한 느낌으로 한 시절을 지나온 내 얼굴이 창가에 어린다. 지금 눈을 감으면 깊은 잠에 빠질 수 있을 것 같은데. 더 보기

팬을 강조해서 ‘빠’라고 부르듯, 이건 아빠에게 전하는 팬레터 § 오랜만에 김명기 시인의 ‘목수’라는 시를 읽어 본다. 첫 대가리만 때려 보면 단박에 들어갈 놈인지, 굽어져 뽑혀 나올 놈인지 안다는 화자의 말이 여전히 굳건하다. 그 단언이 가슴 깊숙이 박혔던 2022년 봄을 나는 기억하고 있다. 그 시를 읽고 처음으로 아빠에 관한 시와 소설을 썼던 기억 역시 선연하다. 아빠도 더 보기

1 어느 겨울 나는 새벽부터 일어나 호수 공원으로 향했어. 물안개를 보고 싶어서. 보고 싶은 마음만 있다면 못 볼 게 없다고 생각했어. 이곳에서 저곳까지의 거리는 아무리 멀어도 결국 움직임의 문제니까. 몸이 있어도 마음이 없으면 움직일 수 없지만, 몸이 없어도 마음이 있다면 어디든 갈 수 있다고 생각했으니까. 목도리를 하고, 롱패딩을 입고, 핫팩을 두어 개 챙겨서 도착한 호수 더 보기

1 마음을 한옥의 구조로 만들고 있는 요즘이다. 갈비뼈처럼 뻗은 서까래와 숲에서 얻은 것들로 덧바른 슬픔의 벽체. 다 좋지만 이 모든 작업은 사랑채를 만들기 위해 시작한 일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마음이 원룸이었던 시절, 타인을 생활에 끌어들이는 일은 내 초라함을 고백하는 것과 다르지 않았으니까. 사랑채의 사랑(舍廊)은 집과 마루를 의미할 뿐이지만 한 사람의 마음에 [잘 머물다 가요] 하고 더 보기

버드나무가 여름 햇빛으로 자신의 초록을 세상에 꺼내두는 사이 나도 장롱에서 여름옷을 꺼냈습니다. 반팔 몇 개를 몸에 대어 보며 올여름의 나는 작년 여름보다 팔이 조금 길어졌을까, 하는 사이에는 바다에 두 번 다녀왔습니다. 한 번의 바다에서는 지난 시간의 나를 후회했고 다른 한 번의 바다에서는 돌아갈 용기를 가진 사람이 후회도 할 수 있는 것이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불확실한 미래를 더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