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람들이 보편적으로 가장 매력을 느끼는 색은 파란색이라고 한다. 한 여론조사에서 4대륙, 10개국 사람들에게 제일 좋아하는 색을 물어봤는데 10개국 모두에서 인종, 성별, 나이와 상관없이 파란색을 꼽았다. 동물행동학자인 Ashley Ward는 파란색이 사람들을 차분하게 진정시킨다고 말하며 이 색을 맑은 하늘, 강, 호수, 바다와 같은 자연, 순수함이라는 특성과 연관 지어 생각했다.₁ 나도 파랑을 좋아한다. 내가 손에 꼽을 만큼 좋아하는 파랑은 인생 곳곳에서 등장했다.
내가 초등학교 때까지 우리 가족은 할머니댁에 가서 새해를 맞이했다. 전라남도 삼호에 위치한 할머니집은 남부지방의 전형적인 일(一)자형 한옥집이었는데, 긴 마루에 부엌과 여러 개의 방이 나란히 붙어있는 구조였다. 방에서 마당 쪽으로 난 나무 창살문을 열면 처마 아래로 하늘이 꽉 차게 보였다. 지금도 새해 첫날이 되면 자다 일어나 그 문을 열고 뜨거운 온돌바닥에 누워 두꺼운 솜이불을 덮은 채 코 끝이 빨개질 때까지 밖을 바라본 기억이 난다. 그 짙고 깊은 파란 하늘, 상쾌한 공기까지 생생하다. 그 하늘이 보여준 색은 내게 ‘새해의 찬 공기 같은 상쾌한 파랑’으로 기억된다.

학생 시절, 근대미술을 배우는 시간에 김환기 화백의 그림을 보았다. 제목은 <피난열차>, 1951년 작으로 한국전쟁 당시를 표현한 작품이다. 붉은 땅 위로 열차가 지나가고 거기에 사람들이 성냥개비 마냥 가득 차 있다. 어두침침한 하늘만이 배경을 채우고 있다. 수업시간에 그 그림을 설명하던 교수님은 전쟁 와중의 처절한 광경을 이렇게 이쁘게 그려 내다니 화가 날 지경이라는 식으로 말씀하셨다. 교수님 말씀에 충분히 공감이 될 만큼 그 그림은 특별난 심미성을 가졌다. 1957년 김환기 화백은 프랑스 니스에서 개인전을 했을 때 방송에 나가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 “우리 한국의 하늘은 지독히 푸릅니다. 하늘 뿐이 아니라, 동해 바다 또한 푸르고 맑아서 흰 수건을 적시면 푸른 물이 들 것 같은 그런 바다입니다.”₂ 저 발언을 보고 난 생각했다. <피난열차>의 파랑은 지독한 파랑이구나.

작년 말 아르헨티나 남단에서 Perito Moreno 빙하를 보았다. 빙하는 움직이는 하얀 산 같았다. 그 하양은 파랑으로 수렴하고 있었다. 이 색은 빙하의 형성과도 관련이 있다. 빙하는 눈이 쌓여서 만들어진다. 하늘에서 떨어진 눈은 결정 형태로 다량의 공기와 함께 쌓인다. 눈이 점점 쌓일수록 무게로 인해 쌓인 눈은 압축되고 공기층은 방울 형태로 얼음에 갇힌다. 이때 눈의 결정구조가 단순해지면서 빛을 투과하여 하얀 눈은 투명한 얼음과 같이 된다. 시간이 지날수록 압력과 온도의 변화에 따라 눈의 구조가 변하고 공기 방울은 적어지며 더욱 투명해지면서 빛을 반사 시키고 굴절시켜 푸른 색을 띠게 된다. 파랗게 보이는 빙하는 Blue ice라고 부르는데, 블루아이스는 보통 빙하의 끝부분에 위치하며 강한 바람으로 빙하 표면의 눈이 제거되어 볼 수 있는 것이다.₃ 하양에서 수렴하는 파랑, 빙하에서 처음 본 이 파랑은 눈과 공기와 빛과 시간과 바람이 만들어낸 것이었다.

이러한 파랑들을 만난 건 참 행운이었다. 문득 그 색들을 떠올리는 것만으로 다른 세계에 잠깐 다녀올 수 있으니 말이다. 이런 세계들은 나의 일부가 되고, 그 덕에 나는 세상을 좀더 사랑하게 되는 것 같다.
₁ 애슐리 워드, <센세이셔널>, 상상스퀘어, 2024, p.79
₂ 김환기, 『색리(色里)의 얼굴 외 2편_김환기 대표 수필집』, 북아띠, 2023, p.10
- 글과 빙하 사진 박지연

- 김환기 그림에 대한 기사: www.hankyung.com/article/202203045109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