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 좋은 생각 품고
머물다가 
떠나가는 곳

풍류


  • 서시

    나는 너무나 많은 첨단의 노래만을 불러왔다나는 정지의 미에 너무나 등한하였다나무여 영혼이여가벼운 참새같이 나는 잠시 너의흉하지 않은 가지 위에 피곤한 몸을 앉힌다성장(成長)은 소크라테스 이후의 모든 현인들이 하여온 일정리(整理)는 전란에 시달린 20세기 시인들이 하여놓은 일그래도 나무는 자라고 있다 영혼은그리고 교훈은 명령은나는아직도 명령의 과잉을 용서할 수 없는 시대이지만이 시대는 아직도 명령의 과잉을 요구하는 밤이다나는 그러한 밤에는 부엉이의 노래를 더 보기

  • 마지막 폭죽

    겨울이면 늘 상상했다. 웃고 떠드는 사람들 사이를 갈라놓듯 큰 붓에 검정색 물감을 듬뿍 묻혀 그림을 망치는 상상. 벌어진 밤의 틈새로 내가 타진하는 가능성이란 언제나 그렇게 조금만 반짝여도 환희로 꽉 찰 것 같은, 그러나 나 말고는 누구도 이해하지 못할 희망이었다. 그러니 너는 아무 말도 하지 말아줘. 그냥 나를 떠나 줘. 장면 하나, 포장을 뜯는다. 상자 속엔 더 보기

  • 12월의 앞사람

    구두를 신고 걸어가는 앞사람을 본다. 천사 같다는 생각왜 들었을까. 무슨 일 있어? 전화 너머로 네가 물어오는데 대답할 수가 없다. 이유 없이 내 앞사람이 천사 같다는 말을 할 수는 없는 것이다. 여보세요? 그렇게 되묻는 네 목소리가 아무리 따뜻하다 해도 빙판길 때문에 앞사람이 넘어지진 않을까 걱정이다. 훤히 드러난 발목이 마음을 조급하게 한다. 그럼에도 물 흐르듯 움직이는 수많은 더 보기

  • 나의 순정 만화

    어른이 되면 멋진 연애를 하고 싶었어. 배낭을 메고 떠난 유적지에서 우연히 입을 맞추거나, 흔들리는 케이블카에 단둘이 갇혀 두근대며 잠시 손을 잡는 두사람…… 같은(아무튼, 안경을 벗고 펑! 미인으로 변했다는 설정) 어른이 되면 암이 생길 줄 몰랐어. 종양이 생긴 갑상샘 반쪽을 자르게 될 줄도, 쇄골 위에 툭 튀어나온 흉터가 빨갛게 자리잡을 줄도. 30대에 연애를 하게 될 줄 더 보기

  • 애매모호

    올 가을엔 가을 냄새를 맡아보지 못한 것 같다. 가을이 온 건지 아닌지도 모르겠다. 간만에 얻은 긴 연휴에 올라선 여행길에서 본 꽃과 들녘도 지금이 가을인 건지 아닌지 헷갈리는 모양새였다. 주춤주춤 피어 있는 코스모스도 언제부턴가 한국의 토종 꽃처럼 불렸는데 개나리나 해바라기 같은 이름이 아닌 cosmos여서 다른 꽃보다 눈치가 더 보이는 듯했다. 뒤늦게 북상한 태풍들도 번지수를 잘못 찾았다는 더 보기

  • 오묘(奧妙)

    성공을 한 사람을 찾으려면 그건 아마 모래사장에서 바늘 찾기일 거야. 내가 쌓은 모래성을 호시탐탐 노리는 파도가 얼마나 높은데. 그저께는 오묘의 모래성이 무너졌고, 어제는 오묘가 바닷속으로 사라졌다. 오묘는 억울하다고 했다. 모래성이 몽땅 무너진 것도 아닌데……나는 작게 중얼거렸다. 내 작은 모래 무덤을 보면서. 오묘는 떠나기 전에 내게 말했다. 바닷속은 컴컴하고 차가워. 그래도 계속 가다 보면 감각이 무뎌지는 더 보기

  • 둥둥

    이렇게 배고픈 밤엔 미역국을 끓여요 혼자 먹기 아까우니 친구를 불러요 친구가 올 때까지 무얼 할까요? 제 경우엔 ― 친구를 기다려요 차가 막힐 거예요 마음에 드는 옷 없을 거예요 더운 물이 나오지 않을 거예요 몰라요 배가 너무 고파서 과자를 뜯었어요 봉지 안의 별조각들을 쓸어 삼켰어요 제가, 허풍이 좀 있어요 국 끓는 소리에 잠이 솔솔 오는데 와서 더 보기

  • 소격동

    오래된 식당에서 나왔을 땐 일곱 시 정도 몇 분인지는 중요하지 않고 다만 개망초 흰 꽃잎이 난분분한 저녁 하늘을 올려다보면 대충 반으로 나눠 먹던 호빵처럼 두 쪽으로 찢어진 구름 사이에 어둠이 들어차는 중이고 나는 알게 모르게좋아지는 중이야 여름 하늘에서 가뿐히 호빵을 발견하듯네가 숨겨둔 슬픔도 알아챘다면 더욱 좋았겠지만 종로는 여전히 골목이 많네 내가 가진 골목과 네가 가진 더 보기

  • 살려고 그래

    급하게 집을 나섰다. 커다란 열기에 숨이 턱- 하고 막힌다. 그렇지만 걸음을 늦출 순 없다. 아무리 기다려도 초록 불로 바뀔 생각을 하지 않는 집 앞 횡단보도 신호등. 발을 동동 구르던 그때. 열차가 역을 떠났다는 안내음 들린다. 망연자실한 마음은 이내 꽉 붙잡고 있던 허리를 놓친다. 자세가 불량해진다. 신호등이 초록 불로 바뀌었지만 동동 구르던 발은 어느새 굼뜬 군함처럼 더 보기

  • 작년말에 팥이 강원도 원주의 그루터기를 방문, 부녀가 전시하는 <부엌전>을 보고난 후 그림작가 김지애를 만났다. 우선 그 따스한 느낌이 물씬 풍기는 그루터기라는 장소의 아름다움에 반했다. 전시작들을 찬찬히 살펴보니 나무를 깎는 아버지 김진성 작가의 정감어린 소반, 쟁반, 그릇, 덮개, 주걱 하나하나가 다 주옥같았다. 또 그 감성 그대로 따님인 보리차룸 김지애 작가가 그린 한없이 사랑스러운 그림들이 함께 전시되어 더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