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절산문 [식단표]를 들어가며 날짜는 몸으로 겪고 계절은 마음으로 통과하는 중입니다. 그런 이유로, 새해와 입춘 중 어느 쪽을 시작이라 부르면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불 꺼진 거실에 앉아 지난날을 펼쳐봅니다. 쉼 없이 내리던 봄비도 조금씩 잦아들고 있습니다. 용액을 흘려야 숨겨진 문장이 드러나던 편지처럼, 어떤 기억은 슬픔으로 번진 뒤에 추억이 되겠죠. 하지만 들키고 싶지 않던 마음을 열어볼 자신이, 오늘의 더 보기
지난 3월, 무척 다양한 모습을 하고 있는 단일체의 형상을 보았다. 그 미지의 형상은 수탉의 머리, 공작의 목, 인도혹소의 혹, 사자의 허리, 뱀의 꼬리, 코끼리 다리, 사슴 다리, 호랑이 다리, 연꽃을 쥔 사람의 손을 하고 있었다. 그 정체는 힌두교 신화에 나오는 나바군자라 Navagunjara라는 전설의 동물이었다. 인도 뉴델리에 위치한 국립공예박물관의 <엮음과 짜임 Entangled and Woven> 전시에서 보았는데, 더 보기
그는 내 안에 갇혔다 그리고 슬픔은 그의 안에 갇혔다 그는 예전과 달리 여유가 조금 생겼다, 공원의 좁은 나뭇잎들 아래로 천천히 걷다가 사다리로 올라가 하늘을 뜯어버렸다, 구멍을 막아놓은 판자처럼 빗방울 혹은 별과 검은 빛이 쏟아질 테고 너는 바라볼 것이다, 라고 그는 생각할 테지만 나는 여전히 분주했다, 뜯지 않은 서류가쌓여 있고 오후의 햇빛은 빛났다그가 가는 곳을 신경 더 보기
네 속을 열면 몇 번이나 얼었다 녹으면서 바람이 불 때마다 또 다른 몸짓으로 자리를 바꾸던 온실들이 엉켜 울고 있어. 땅에는 얼음 속에서 썩은 가지들이 실눈을 뜨고 엎드려 있었어. 아무에게도 줄 수 없는 빛을 한 점씩 하늘 낮게 박으면서 너는 무슨 색깔로 또 다른 사랑을 꿈꾸었을까. 아무도 너의 영혼에 옷을 입히지 않던 사납고 고요한 밤, 얼어붙은 더 보기
아주 가끔은사과나무 아래 서 있고 싶다살아온 날과 살아갈 날들이두 팔 벌리고 서 있는사과나무밭태양이 눈부신 날이어도 좋고눈 내리는 그 저녁이어도 좋으리아주 가끔은 그렇게사과나무 아래 서 있고 싶다내가 아직 어린 소년이어도 좋고사과나무처럼 늙은 뒤라도 좋으리가끔은 그렇게사과나무 아래 서 있고 싶다 류시화의 <사과나무> 더 보기
2025년 가을에 첫 개인전 <흑백, 해몽>을 체리암에서 열었던 홍혜정 작가와의 대화 문학소녀로 자란 소설가 지망생이던 홍혜정은 평소에 낙서를 즐겼다. 그래서 낙성대쪽 단골 음악 펍인 사운드마인드에서 음악신청지에 낙서를 하곤 했다. 특히 문예지에 단편소설 투고한 뒤 낙담한 기분을 달래러 바에 앉아 그렸던 것이다. 이 그림들을 알아본 사장님이 그림을 본격 그려보라고 격려한 결과, 인스타에 하나씩 올리고 있던 차에 더 보기
나는 너무나 많은 첨단의 노래만을 불러왔다나는 정지의 미에 너무나 등한하였다나무여 영혼이여가벼운 참새같이 나는 잠시 너의흉하지 않은 가지 위에 피곤한 몸을 앉힌다성장(成長)은 소크라테스 이후의 모든 현인들이 하여온 일정리(整理)는 전란에 시달린 20세기 시인들이 하여놓은 일그래도 나무는 자라고 있다 영혼은그리고 교훈은 명령은나는아직도 명령의 과잉을 용서할 수 없는 시대이지만이 시대는 아직도 명령의 과잉을 요구하는 밤이다나는 그러한 밤에는 부엉이의 노래를 더 보기
겨울이면 늘 상상했다. 웃고 떠드는 사람들 사이를 갈라놓듯 큰 붓에 검정색 물감을 듬뿍 묻혀 그림을 망치는 상상. 벌어진 밤의 틈새로 내가 타진하는 가능성이란 언제나 그렇게 조금만 반짝여도 환희로 꽉 찰 것 같은, 그러나 나 말고는 누구도 이해하지 못할 희망이었다. 그러니 너는 아무 말도 하지 말아줘. 그냥 나를 떠나 줘. 장면 하나, 포장을 뜯는다. 상자 속엔 더 보기
구두를 신고 걸어가는 앞사람을 본다. 천사 같다는 생각왜 들었을까. 무슨 일 있어? 전화 너머로 네가 물어오는데 대답할 수가 없다. 이유 없이 내 앞사람이 천사 같다는 말을 할 수는 없는 것이다. 여보세요? 그렇게 되묻는 네 목소리가 아무리 따뜻하다 해도 빙판길 때문에 앞사람이 넘어지진 않을까 걱정이다. 훤히 드러난 발목이 마음을 조급하게 한다. 그럼에도 물 흐르듯 움직이는 수많은 더 보기
어른이 되면 멋진 연애를 하고 싶었어. 배낭을 메고 떠난 유적지에서 우연히 입을 맞추거나, 흔들리는 케이블카에 단둘이 갇혀 두근대며 잠시 손을 잡는 두사람…… 같은(아무튼, 안경을 벗고 펑! 미인으로 변했다는 설정) 어른이 되면 암이 생길 줄 몰랐어. 종양이 생긴 갑상샘 반쪽을 자르게 될 줄도, 쇄골 위에 툭 튀어나온 흉터가 빨갛게 자리잡을 줄도. 30대에 연애를 하게 될 줄 더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