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근 전 달걀을 깨뜨리며 생각한다. 언제부턴가 두 음절 단어는 캡슐처럼 깨뜨릴 수 있을 것만 같다고. 호빵을 찢으면 앙금이 펼쳐지듯 책장을 가르면 이야기가 쏟아질 것만 같다고. 낙차를 견디지 못한 노른자가 햇빛으로 번지는 아침. 그러나 어떤 이야기는 기어이 실밥을 뜯어야만 나오겠지. 사람과 사람을 미닫이문처럼 잡고 틈을 벌리던 한때로부터, 그 악력으로 애써 봉합해둔 한 사람의 마음을 열어보려던 계절로부터… 더 보기
망설임 없이 기다리기 숨과 숨이 모여 숲이 되는 순간을 가만히 귀 기울이기 안녕 으름덩굴이 나무를 감고 올라가 하늘을 열어젖힙니다 환하게 쏟아지는 연자주빛 향기 은사시나무는 가볍게 몸을 떨며 빛을 세공하고 하얀 꽃가루가 천천히 유영합니다 빛의 숨결을 따라 사랑의 꿈을 꿉니다 반듯하고 따뜻한 돌은 작은 발자국들의 식탁 소복이 쌓인 도토리 껍질 위로 배부르게 고이는 햇살 오색딱따구리가 떨어뜨리고… 더 보기
처음에는 당연히 꽃을 보여주지요 쌀 안치는 소리를 내면서 피는 꽃들 말이지요 그 꽃들 지고 나면 잎을 보여주고요, 그러면 잎은 그늘을 주지요 그 다음에는 풋살구를 주지요 풋살구를 주고 나서는 아픈 배를 주지요 아픈 배가 다 낫기를 기다리다가 노랗게 통통 잘 익은 살구를 주지요 (살구를 장에 내다 팔면 돈을 주지요) 작고 파란 것들이 이파리에 오물오물 몰려드는 건… 더 보기
너무도 여러 겹의 마음을 가진 그 복숭아나무 곁으로 나는 왠지 가까이 가고 싶지 않았습니다 흰꽃과 분홍꽃을 나란히 피우고 서 있는 그 나무는 아마 사람이 앉지 못할 그늘을 가졌을 거라고 멀리로 멀리로만 지나쳤을 뿐입니다 흰꽃과 분홍꽃 사이에 수천의 빛깔이 있다는 것을 나는 그 나무를 보고 멀리서 알았습니다 눈부셔 눈부셔 알았습니다 피우고 싶은 꽃빛이 너무 많은 그… 더 보기
계절산문 [식단표]를 들어가며 날짜는 몸으로 겪고 계절은 마음으로 통과하는 중입니다. 그런 이유로, 새해와 입춘 중 어느 쪽을 시작이라 부르면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불 꺼진 거실에 앉아 지난날을 펼쳐봅니다. 쉼 없이 내리던 봄비도 조금씩 잦아들고 있습니다. 용액을 흘려야 숨겨진 문장이 드러나던 편지처럼, 어떤 기억은 슬픔으로 번진 뒤에 추억이 되겠죠. 하지만 들키고 싶지 않던 마음을 열어볼 자신이, 오늘의… 더 보기
지난 3월, 무척 다양한 모습을 하고 있는 단일체의 형상을 보았다. 그 미지의 형상은 수탉의 머리, 공작의 목, 인도혹소의 혹, 사자의 허리, 뱀의 꼬리, 코끼리 다리, 사슴 다리, 호랑이 다리, 연꽃을 쥔 사람의 손을 하고 있었다. 그 정체는 힌두교 신화에 나오는 나바군자라 Navagunjara라는 전설의 동물이었다. 인도 뉴델리에 위치한 국립공예박물관의 <엮음과 짜임 Entangled and Woven> 전시에서 보았는데,… 더 보기
그는 내 안에 갇혔다 그리고 슬픔은 그의 안에 갇혔다 그는 예전과 달리 여유가 조금 생겼다, 공원의 좁은 나뭇잎들 아래로 천천히 걷다가 사다리로 올라가 하늘을 뜯어버렸다, 구멍을 막아놓은 판자처럼 빗방울 혹은 별과 검은 빛이 쏟아질 테고 너는 바라볼 것이다, 라고 그는 생각할 테지만 나는 여전히 분주했다, 뜯지 않은 서류가쌓여 있고 오후의 햇빛은 빛났다그가 가는 곳을 신경… 더 보기
네 속을 열면 몇 번이나 얼었다 녹으면서 바람이 불 때마다 또 다른 몸짓으로 자리를 바꾸던 온실들이 엉켜 울고 있어. 땅에는 얼음 속에서 썩은 가지들이 실눈을 뜨고 엎드려 있었어. 아무에게도 줄 수 없는 빛을 한 점씩 하늘 낮게 박으면서 너는 무슨 색깔로 또 다른 사랑을 꿈꾸었을까. 아무도 너의 영혼에 옷을 입히지 않던 사납고 고요한 밤, 얼어붙은… 더 보기
아주 가끔은사과나무 아래 서 있고 싶다살아온 날과 살아갈 날들이두 팔 벌리고 서 있는사과나무밭태양이 눈부신 날이어도 좋고눈 내리는 그 저녁이어도 좋으리아주 가끔은 그렇게사과나무 아래 서 있고 싶다내가 아직 어린 소년이어도 좋고사과나무처럼 늙은 뒤라도 좋으리가끔은 그렇게사과나무 아래 서 있고 싶다 류시화의 <사과나무> 더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