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 좋은 생각 품고
머물다가 
떠나가는 곳

풍류


  • 나의 순정 만화

    어른이 되면 멋진 연애를 하고 싶었어. 배낭을 메고 떠난 유적지에서 우연히 입을 맞추거나, 흔들리는 케이블카에 단둘이 갇혀 두근대며 잠시 손을 잡는 두사람…… 같은(아무튼, 안경을 벗고 펑! 미인으로 변했다는 설정) 어른이 되면 암이 생길 줄 몰랐어. 종양이 생긴 갑상샘 반쪽을 자르게 될 줄도, 쇄골 위에 툭 튀어나온 흉터가 빨갛게 자리잡을 줄도. 30대에 연애를 하게 될 줄 더 보기

  • 애매모호

    올 가을엔 가을 냄새를 맡아보지 못한 것 같다. 가을이 온 건지 아닌지도 모르겠다. 간만에 얻은 긴 연휴에 올라선 여행길에서 본 꽃과 들녘도 지금이 가을인 건지 아닌지 헷갈리는 모양새였다. 주춤주춤 피어 있는 코스모스도 언제부턴가 한국의 토종 꽃처럼 불렸는데 개나리나 해바라기 같은 이름이 아닌 cosmos여서 다른 꽃보다 눈치가 더 보이는 듯했다. 뒤늦게 북상한 태풍들도 번지수를 잘못 찾았다는 더 보기

  • 오묘(奧妙)

    성공을 한 사람을 찾으려면 그건 아마 모래사장에서 바늘 찾기일 거야. 내가 쌓은 모래성을 호시탐탐 노리는 파도가 얼마나 높은데. 그저께는 오묘의 모래성이 무너졌고, 어제는 오묘가 바닷속으로 사라졌다. 오묘는 억울하다고 했다. 모래성이 몽땅 무너진 것도 아닌데……나는 작게 중얼거렸다. 내 작은 모래 무덤을 보면서. 오묘는 떠나기 전에 내게 말했다. 바닷속은 컴컴하고 차가워. 그래도 계속 가다 보면 감각이 무뎌지는 더 보기

  • 둥둥

    이렇게 배고픈 밤엔 미역국을 끓여요 혼자 먹기 아까우니 친구를 불러요 친구가 올 때까지 무얼 할까요? 제 경우엔 ― 친구를 기다려요 차가 막힐 거예요 마음에 드는 옷 없을 거예요 더운 물이 나오지 않을 거예요 몰라요 배가 너무 고파서 과자를 뜯었어요 봉지 안의 별조각들을 쓸어 삼켰어요 제가, 허풍이 좀 있어요 국 끓는 소리에 잠이 솔솔 오는데 와서 더 보기

  • 소격동

    오래된 식당에서 나왔을 땐 일곱 시 정도 몇 분인지는 중요하지 않고 다만 개망초 흰 꽃잎이 난분분한 저녁 하늘을 올려다보면 대충 반으로 나눠 먹던 호빵처럼 두 쪽으로 찢어진 구름 사이에 어둠이 들어차는 중이고 나는 알게 모르게좋아지는 중이야 여름 하늘에서 가뿐히 호빵을 발견하듯네가 숨겨둔 슬픔도 알아챘다면 더욱 좋았겠지만 종로는 여전히 골목이 많네 내가 가진 골목과 네가 가진 더 보기

  • 살려고 그래

    급하게 집을 나섰다. 커다란 열기에 숨이 턱- 하고 막힌다. 그렇지만 걸음을 늦출 순 없다. 아무리 기다려도 초록 불로 바뀔 생각을 하지 않는 집 앞 횡단보도 신호등. 발을 동동 구르던 그때. 열차가 역을 떠났다는 안내음 들린다. 망연자실한 마음은 이내 꽉 붙잡고 있던 허리를 놓친다. 자세가 불량해진다. 신호등이 초록 불로 바뀌었지만 동동 구르던 발은 어느새 굼뜬 군함처럼 더 보기

  • 작년말에 팥이 강원도 원주의 그루터기를 방문, 부녀가 전시하는 <부엌전>을 보고난 후 그림작가 김지애를 만났다. 우선 그 따스한 느낌이 물씬 풍기는 그루터기라는 장소의 아름다움에 반했다. 전시작들을 찬찬히 살펴보니 나무를 깎는 아버지 김진성 작가의 정감어린 소반, 쟁반, 그릇, 덮개, 주걱 하나하나가 다 주옥같았다. 또 그 감성 그대로 따님인 보리차룸 김지애 작가가 그린 한없이 사랑스러운 그림들이 함께 전시되어 더 보기

  • 오늘 수영하기

    2025년 5월, 두 수요일밤에 걸쳐 문학평론가 김웅기 선생이 김수영 시 수업을 진행하였다. 김웅기 선생은 체리암 산문 연작 중 <물끄러미 건너가기>의 필자이기도 하다. 팥이 김 선생님께 강연을 의뢰하게 된 인연은 장대성 시인의 체리암 시 낭독회의 진행자로 만난 때부터 이어졌다. 경희대학교에서 <김수영의 변증법적 공간 연구>로 석사학위를 받았고 현재 같은 대학교에서 강의도 하시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2회에 더 보기

  • 버드나무 아래에서

    녹음 아래로 작은 빛이 발등에 내려앉는다주머니 안에 나 모르게 들어있던 손톱만 한 흰 종이학의 모양으로 첫 도둑질중학생 때 좋아하던 애의 교복 마이 단추, 자세히 기억은 나지 않는데 딱 하나,그 남자애는 우리가 살아보지도 못한 시대의 노래를 허밍으로 부르곤 했지 걔에게 선율을 옮겼을 사람은 누구일까? 자주 그 어깨와 옆태를 그려봤지아주 오래전, 키가 걔만 할 때 그 노래를 더 보기

  • 용융

    봄어깨에 두른 외투를 떨어뜨린 사람 여름민소매 원피스를 고르는 사람 그날 다 봤다 고가 아래두껍게 껴입고 사는길사람 기지개 켜고아침에 몇 번솜주먹으로 내리치다 만 겨드랑이 생각이 났다 너와 나의 림프절우리들의 대관절 길길이 길이길이날뛰며 꺼지는 법 없이 오늘도 사람 많은 길을 걸었다 유럽 같아?CD 있어요?신이 한국인이야? 사진 찍어주던 사람에게멀리 농성 소리가까이 연주 마친 사람에게 그렇다고 믿고 있을 사람에게 더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