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 좋은 생각 품고
머물다가 
떠나가는 곳

겨울이면 늘 상상했다. 웃고 떠드는 사람들 사이를 갈라놓듯 큰 붓에 검정색 물감을 듬뿍 묻혀 그림을 망치는 상상. 벌어진 밤의 틈새로 내가 타진하는 가능성이란 언제나 그렇게 조금만 반짝여도 환희로 꽉 찰 것 같은, 그러나 나 말고는 누구도 이해하지 못할 희망이었다. 그러니 너는 아무 말도 하지 말아줘. 그냥 나를 떠나 줘.

장면 하나,

포장을 뜯는다. 상자 속엔 나무로 조각된 오르골이 들어 있다. 내가 아주 오래전부터 갖고 싶었던 오르골이다. 한 사내와 어린아이가 손을 잡고 있다. 나머지 손으로는 먼 곳을 가리키고 있다. 태엽을 감아두면 <섬집아기>의 멜로디가 흐르며 사내와 어린아이가 가리키는 방향이 시시각각으로 달라진다. 나는 멜로디가 다 흘러나오길 기다렸다가 태엽을 한 번 더 감았다. 사내와 어린아이는 계속 돌아가면서 그들의 지향을 바꿔가고 나는 그 손 끝에 무엇이 있을지 상상하며 창밖을 바라본다.

벌써 겨울이구나. 겨울엔 음식을 적게 먹어야만 한다. 배가 부르면 잠이 오지 않는다. 몸속에서 무언가가 끊임없이 움직인다는 상상을 하면 괴롭다. 그래서 삶이 괴로울 때도 있었지. 그렇지만 멈출 용기는 없었던 날들. 나는 자축하는 지경에 이르렀어. 그런 삶을. 폭죽을 펑펑 터뜨리며 아이처럼 웃어보았어. 그때 네가 했던 말 기억나? 우린 분명 헤어지게 될 거야. 우리가 잘 살기로 마음먹는 그때부터 낭만은 질식해 버리고 말 거야. 네 말이 맞았어. 나는 지금 어떤 감정도 느껴지지 않아. 그저 겨울일 뿐. 그저 춥고, 그저 시리고, 그저 아플 뿐. 슬프다는 감각은 집안을 구석구석 뒤져봐도 네가 다 가져갔나 봐.

네가 남긴 건 오르골뿐이다. 오르골에서 흘러나오는 멜로디를 따라 섬집을 지어봤다. 따뜻하지 않아서 좋았다. 내 장래희망은 차가운 기억이었으니까. 너에게 나는 눈으로 내리길 바라. 가끔 눈이 그치면 태엽을 꼭 감아주길. 나는 여느 때와 같이 재생될게.

장면 둘,

오랜만에 사진을 찍었다. 횡단보도를 건너려는데, 청사 건물 뒤로 석양이 물들고 있었다. 도로 위의 신호등 불빛과 어린이 보호구역의 샛노란 안전표지들이 늦가을 단풍처럼 번졌다. 조도를 낮춰보고, 조리개를 열어보고, 이것저것 건드려 보았지만 눈만큼 나은 해상도는 존재하지 않았다. 아쉬운 마음에 신호가 바뀔 때까지 길 위에 서 있었다. 버스가 경적을 울렸다. 순간 놀라서 뒷걸음질을 쳤다. 저녁은 순식간에 온다. 나는 양을 치는 개처럼 어둠을 몰고 다니는 미래에 대해 말하기를 좋아했다. 지금과 같이 쌀쌀한 저녁이었고 폐장한 해수욕장의 모래밭 위에서였을 테다. 나는 너에게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미래가 없지? 그러자 너는 엷은 미소를 띠며 내게 되물었다. 미래가 있으면 어쩌려고? 나는 그 말이 좋았다. 미래가 없다는 단정보다 미래가 없어도 될 거라는 가정이 우리를 조금 더 지속했으므로.

파도가 쳤다. 신발코를 적셨다. 너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나는 그런 너의 어깨에 새 한 마리를 붙여주었다. 이름도 짓지 못했지만. 키워달라는 부탁도 제대로 하지 않았지만. 너는 여전히 그 새를 어깨 위에 붙인 채 세계를 돌아다니고 있다. 고맙다. 내 자유가 너에게 있다. 앞으로도 그럴 미래를 꿈꿨다.

장면 셋,

깨면 그만이지. 눈을 비비며 일어났다. 집 앞에 눈이 많이 쌓였다. 건물 관리인은 삽과 빗자루를 들고 새벽부터 나와서 쌓인 눈을 치우고 있었다. 도와드릴 것이 없겠냐고 물었지만 관리인은 그것이 빈말인 줄 잘 아는 사람이었다. 바쁘니까 방해하지 말고 갈 길이나 가쇼. 나는 멋쩍게 웃으며 현관문을 다시 닫았다. 해는 뜬 지 오래인데 아직 어둡다. 햇빛을 손바닥으로 가리고 그 그늘 안에서 작게 숨 쉬며 살아가는 사람에게 이따위 어둠은 시시한 먹잇감에 불과하다. 나는 그것을 주섬주섬 주워서 주머니에 넣었다. 바지가 시커멓게 바랬다. 무릎을 꿇어도 티가 나지 않는 바지였다. 세탁기에 넣고 세 시간을 돌려도 원래 색깔로 돌아오지 않았다. 어쩌면 그것이 원래 색깔이었는지도 모른다. 지금 그림자처럼 널려 있다. 까맣게 말라가고 있다.

전화가 와 있었다. 다시 걸진 않았지만 안부가 궁금했다. 모르는 번호였지만 왠지 익숙했다. 아주 오래된 친구를 만난 것처럼 ‘먼발치에서’라는 기술이 강력하게 작동한다. 나는 또 야금야금 희망한다. 잘 살고 있을 것이다. 예쁜 사랑도 하고 질 좋은 음식도 먹고 따뜻한 스웨터에 파묻혀 겨울을 노곤노곤 보내고 있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했더니 기분이 좋다. 전화를 다시 걸지 않아도 괜찮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문득 든 생각이 겨울 동안 몰래 수확한 웃음을 잽싸게 가로채려 했지만, 나도 이제 여간해선 당하지 않는다. 오랜만에 설거지도 하고 이불도 개킨다. 기지개를 주욱 켰고, 창문을 열었다. 찬 바람과 함께 흰 빛이 파스스 쏟아진다. 작년에 보았던 희망도 발견한다. 여전히, 무엇으로든, 승화하지 않은 마음을 보면 가슴이 저릿하다. 그것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면서 노래를 불렀다. 그것은 지친 몸을 내게 기댄 채 잠들어 있다. 너는 결코 상상도 못 할 장면.

사실 하나,

한강 위에 커다란 폭죽이 터진다. 나는 저런 찰나를 정말 싫어해. 네가 말한다.

나는 저런 찰나라도 사랑했는데. 내가 말한다.

사라지고 나니 뿌연 연기만 남았다. 나는 신기루라 했고, 너는 희망고문이라 했다. 우리가 본 것은 달랐지만, 우리가 볼 것은 같았다. 그때부터였을까. 너는 끝맺었고 나는 시작했다. 그것이 맞물린 톱니바퀴처럼 굴렀다. 거대하고 규칙적인 소리를 내며 힘차게 굴렀다. 너는 아이를 많이 낳았다. 세계를 돌아다니며 이별을 전도했다. 많은 사람이 너의 수족이 되고 심복이 되었다. 이제 네가 하는 말이면 경전처럼 떠받드는 사람들의 행렬이 지구 둘레보다 길고. 네가 각혈하고 손목을 그을 때마다 그 아래에서 영생을 꿈꾸는 헛된 자들이 벼룩처럼 달라붙었다. 너는 괴로웠지만 태연한 표정으로 노래를 흥얼거렸다. 창밖으로, 돌아올 수 없는 사람의 뒷모습이 자욱했다. 한 사람이 아닌 것 같았다. 점점 희미해지는 노랫소리. 나는 또 한 번 태엽을 감는다. 너는 여느 때와 같이 재생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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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삶을 분열에 기투했습니다. 나는 자주 내가 아니었습니다. 그러면서도 모든 면에서 나였습니다. 그 시간을 인정하지 못한 채 나다움을 발견하려 애썼으니, 올겨울도 허사입니다. 창문을 꼭 닫으세요. 물감이 흘러들지 않도록.

  • 글 김웅기
  • 사진 김솔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