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설임 없이 기다리기 숨과 숨이 모여 숲이 되는 순간을 가만히 귀 기울이기 안녕 으름덩굴이 나무를 감고 올라가 하늘을 열어젖힙니다 환하게 쏟아지는 연자주빛 향기 은사시나무는 가볍게 몸을 떨며 빛을 세공하고 하얀 꽃가루가 천천히 유영합니다 빛의 숨결을 따라 사랑의 꿈을 꿉니다 반듯하고 따뜻한 돌은 작은 발자국들의 식탁 소복이 쌓인 도토리 껍질 위로 배부르게 고이는 햇살 오색딱따구리가 떨어뜨리고… 더 보기
처음에는 당연히 꽃을 보여주지요 쌀 안치는 소리를 내면서 피는 꽃들 말이지요 그 꽃들 지고 나면 잎을 보여주고요, 그러면 잎은 그늘을 주지요 그 다음에는 풋살구를 주지요 풋살구를 주고 나서는 아픈 배를 주지요 아픈 배가 다 낫기를 기다리다가 노랗게 통통 잘 익은 살구를 주지요 (살구를 장에 내다 팔면 돈을 주지요) 작고 파란 것들이 이파리에 오물오물 몰려드는 건… 더 보기
너무도 여러 겹의 마음을 가진 그 복숭아나무 곁으로 나는 왠지 가까이 가고 싶지 않았습니다 흰꽃과 분홍꽃을 나란히 피우고 서 있는 그 나무는 아마 사람이 앉지 못할 그늘을 가졌을 거라고 멀리로 멀리로만 지나쳤을 뿐입니다 흰꽃과 분홍꽃 사이에 수천의 빛깔이 있다는 것을 나는 그 나무를 보고 멀리서 알았습니다 눈부셔 눈부셔 알았습니다 피우고 싶은 꽃빛이 너무 많은 그… 더 보기
그는 내 안에 갇혔다 그리고 슬픔은 그의 안에 갇혔다 그는 예전과 달리 여유가 조금 생겼다, 공원의 좁은 나뭇잎들 아래로 천천히 걷다가 사다리로 올라가 하늘을 뜯어버렸다, 구멍을 막아놓은 판자처럼 빗방울 혹은 별과 검은 빛이 쏟아질 테고 너는 바라볼 것이다, 라고 그는 생각할 테지만 나는 여전히 분주했다, 뜯지 않은 서류가쌓여 있고 오후의 햇빛은 빛났다그가 가는 곳을 신경… 더 보기
네 속을 열면 몇 번이나 얼었다 녹으면서 바람이 불 때마다 또 다른 몸짓으로 자리를 바꾸던 온실들이 엉켜 울고 있어. 땅에는 얼음 속에서 썩은 가지들이 실눈을 뜨고 엎드려 있었어. 아무에게도 줄 수 없는 빛을 한 점씩 하늘 낮게 박으면서 너는 무슨 색깔로 또 다른 사랑을 꿈꾸었을까. 아무도 너의 영혼에 옷을 입히지 않던 사납고 고요한 밤, 얼어붙은… 더 보기
아주 가끔은사과나무 아래 서 있고 싶다살아온 날과 살아갈 날들이두 팔 벌리고 서 있는사과나무밭태양이 눈부신 날이어도 좋고눈 내리는 그 저녁이어도 좋으리아주 가끔은 그렇게사과나무 아래 서 있고 싶다내가 아직 어린 소년이어도 좋고사과나무처럼 늙은 뒤라도 좋으리가끔은 그렇게사과나무 아래 서 있고 싶다 류시화의 <사과나무> 더 보기
나는 너무나 많은 첨단의 노래만을 불러왔다나는 정지의 미에 너무나 등한하였다나무여 영혼이여가벼운 참새같이 나는 잠시 너의흉하지 않은 가지 위에 피곤한 몸을 앉힌다성장(成長)은 소크라테스 이후의 모든 현인들이 하여온 일정리(整理)는 전란에 시달린 20세기 시인들이 하여놓은 일그래도 나무는 자라고 있다 영혼은그리고 교훈은 명령은나는아직도 명령의 과잉을 용서할 수 없는 시대이지만이 시대는 아직도 명령의 과잉을 요구하는 밤이다나는 그러한 밤에는 부엉이의 노래를… 더 보기
구두를 신고 걸어가는 앞사람을 본다. 천사 같다는 생각왜 들었을까. 무슨 일 있어? 전화 너머로 네가 물어오는데 대답할 수가 없다. 이유 없이 내 앞사람이 천사 같다는 말을 할 수는 없는 것이다. 여보세요? 그렇게 되묻는 네 목소리가 아무리 따뜻하다 해도 빙판길 때문에 앞사람이 넘어지진 않을까 걱정이다. 훤히 드러난 발목이 마음을 조급하게 한다. 그럼에도 물 흐르듯 움직이는 수많은… 더 보기
어른이 되면 멋진 연애를 하고 싶었어. 배낭을 메고 떠난 유적지에서 우연히 입을 맞추거나, 흔들리는 케이블카에 단둘이 갇혀 두근대며 잠시 손을 잡는 두사람…… 같은(아무튼, 안경을 벗고 펑! 미인으로 변했다는 설정) 어른이 되면 암이 생길 줄 몰랐어. 종양이 생긴 갑상샘 반쪽을 자르게 될 줄도, 쇄골 위에 툭 튀어나온 흉터가 빨갛게 자리잡을 줄도. 30대에 연애를 하게 될 줄… 더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