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가을엔 가을 냄새를 맡아보지 못한 것 같다. 가을이 온 건지 아닌지도 모르겠다. 간만에 얻은 긴 연휴에 올라선 여행길에서 본 꽃과 들녘도 지금이 가을인 건지 아닌지 헷갈리는 모양새였다. 주춤주춤 피어 있는 코스모스도 언제부턴가 한국의 토종 꽃처럼 불렸는데 개나리나 해바라기 같은 이름이 아닌 cosmos여서 다른 꽃보다 눈치가 더 보이는 듯했다. 뒤늦게 북상한 태풍들도 번지수를 잘못 찾았다는 듯이 근처에만 머물다 물러가길 반복했다. 없는 여유라도 부리며 늦은 밤길을 걸을 때면 살갗에 부딪치는 바람조차도 무언가 조심스러운 표정이었다. 하나둘씩, 아주 익숙하진 않지만 자연스럽게 멀어지고 있었다.
가을이면 나 혼자서만 치르는 고수레가 있다. 특별한 것은 아니지만 먹다 남은 술을 꼭 변기통에 다 버리는 것이다. 잠에서 깬 어느 날 휴대전화에 재난문자 알림이 울리듯이 가을이 나의 콧구멍을 쑤시면 벌떡 일어나 냉장고를 여는 것이다. 그리고 술이 조금씩 남아 있는 술병을 모두 정리하는 것이다. 그것들의 가격이 얼마든, 양주든 소주든 가릴 것 없이 무조건 버리는 것이다. 그리고 옷을 훌렁 벗는다. 1시간 넘게 몸을 씻는다. 다시 단장을 하고 내 기준에서 제일 좋은 옷을 골라 입는다. 그리고 시집을 한 권 챙긴다. 특별한 일이 아니라면 꼭 최승자 시인의 시집을 챙겼다.

개 같은 가을이 쳐들어 온다.
매독 같은 가을.
그리고 죽음은, 황혼 그 마비된
한 쪽 다리에 찾아온다.모든 사물이 습기를 잃고
모든 길들의 경계선이 문드러진다.
레코드에 담긴 옛 가수의 목소리가 시들고
여보세요 죽선이 아니니 죽선이지 죽선아
전화선이 허공에서 수신인을 잃고
한번 떠나간 애인들은 꿈에도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그리고 그리고 괴어 있는 기억의 폐수가
한없이 말 오줌 냄새를 풍기는 세월의 봉놋방에서
나는 부시시 죽었다 깨어난 목소리로 묻는다.
어디 만큼 왔나 어디까지 가야
강물은 바다가 될 수 있을까.– 최승자, 「개 같은 가을이」
이런 시가 수록된 시집을 챙기는 것이다. 그러면 약속이 없어도 외출을 감행할 용기가 난다.
가을을 만끽한다는 말은 딱 그때뿐이다. 날이 서 있으면서도 부드러운 바람결과 적당하게 져줄 줄 아는 햇빛. 반짝거리는 아스팔트 위로 사람들이 외투를 껴입은 것도 아니고 걸친 것도 아니고 어깨에 두르거나 허리에 동여맨 이상한 차림으로 손에 손잡고 걷는 길. 나는 그 풍경들을 훔치듯이 바라본다. 연인들은 이곳저곳으로 쏘아 다니며 사랑과 작별을 수놓고, 다 큰 아들이 늙은 아버지의 등을 어루만지며 앉아 있는 공원 의자엔 알게 모르게 귀여운 짐승들도 자리를 잡고, 아이의 신발을 신기는 할머니의 정수리 위로 따가운 햇볕이 쏟아질 때 아이의 손목에선 어떤 기적이 일어나서 양산을 떠받칠 수 있게 되는 것일까? 하는. 갖은 생각들이 풍경과 뒤섞여 파도 치듯이 해안을 만들어 나가면 나에겐 동해도 필요 없고 서해도 필요 없다. 골목길 안으로 물밀듯 밀려오는 석양의 온도를 가만히 잴 뿐이다.

그 온도는 한없이 차갑다가도 한없이 뜨겁고, 한없이 기쁘다가도 한없이 슬픔으로 가득 메우는 희귀한 물질의 온도를 닮아서 마치 나를 보고 여기 있어서는 안 된다고 접근 제한 명령을 내리는 것 같기도 하다. 그러나 기왕지사 버텨온 삶, 겨울까지 버텨보겠다고 고집을 부리면 한없이 폐부를 찔러대는 가을바람에 덜컥 감기를 앓기도 했다. 약을 먹고 비몽사몽 이몽동몽 꿈만 꾸다가 정신을 차려보면 어느새 사라지고 없는 가을. 그래서 가을의 다른 이름은 그리움이다.
그리운 이름들을 되뇌기 운동 단체에서도 연락이 오지 않는 지금. 여기가 가을일까 아닐까 주춤거리기만 하다가 영원한 작별도 없이 많은 얼굴들을 잃어버린 것 같다. 내 나이 서른. 적지도 많지도 않은 나이. 아주 새로운 일을 해보거나 아주 새로운 사람을 사귀기엔 늦은 것 같다가도 지금 하는 일과 지금 만난 사람들이 끝이라고 하기엔 이른 것 같은 이 애매모호! 어쩌다 시절마저도 가을을 닮아 함께 사라지려 하는지, 철없이 슬픔만 노래하기엔 내일 당장 출근을 해야 하고, 성실히 출근만 하기에는 외로운 풍경이 덥석덥석 밟혀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해 하늘만 쳐다보는 주말이다. 월요일이고, 화요일이다. 버리기엔 아까운 술만 들이키다, 에라이 가을이다.

<물끄러미 건너가기> 가을 산문
- 작가 김웅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