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 좋은 생각 품고
머물다가 
떠나가는 곳

1
마음을 한옥의 구조로 만들고 있는 요즘이다. 갈비뼈처럼 뻗은 서까래와 숲에서 얻은 것들로 덧바른 슬픔의 벽체. 다 좋지만 이 모든 작업은 사랑채를 만들기 위해 시작한 일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마음이 원룸이었던 시절, 타인을 생활에 끌어들이는 일은 내 초라함을 고백하는 것과 다르지 않았으니까. 사랑채의 사랑(舍廊)은 집과 마루를 의미할 뿐이지만 한 사람의 마음에 [잘 머물다 가요] 하고 쪽지를 새겨두는 것이 사랑이기도 하니까. 내게는 그 공간이 별채로 남았으면 좋겠다. 내게 속해있지만 완전히 내 것은 아닌 마음. 그 마음을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둘러보는 시간 속에서 계절이 오고 간다면, 아무래도 좋을 것이다.

2
타인, 타인, 타인, 발음을 굴리다 보면. 유해한 물질의 이름 같기도 하고, 여태껏 쇠퇴하지 않은 부족 같기도 하고.

3
6월 중순부터 7월 말까지 제주에 머물렀다. 한 달은 미리 잡아둔 숙소에서 창작에 매진했고, 일주일은 게스트하우스를 돌아다니며 사람들을 만났다. 그 시간을 어떻게 갈음하면 좋을까. 결과적으로 나는 몇 편의 시를 써냈으나 사실 괴로울 만큼 시가 써지지 않았고, 흥미롭게 들었던 많은 이야기들은 며칠 뒤 모두 잊어버리고 말았다.

하루는 사람들과 게스트하우스 근처 편의점에서 맥주를 마셨다. 저편에서 불어오는 해풍을 맞으며 나는 먼 곳을 바라봤다. 연초, 다시 시작해보겠다고 쓴 시에서 나는 가고 싶은 가장 먼 곳을 떠올렸는데. 그곳이 제주는 아니었지만 이만하면 멀리 온 건가. 멀리 왔다는 안도가 멀리 가보려는 마음을 잡아먹은 건 아닌가. 그래서 내가 지금 시를 못 쓰나… 하다가 불현 듯 혼자 바다로 터덜터덜 걸어갔다.

으아아아 크하하.

그리고 소리를 질렀다… 지르다 웃었다, 가 맞으려나. 여하튼 나름의 답답함을 게워내고 편의점으로 돌아와 태연한 척 있었는데, 사람들이 내 비명을 들었다는 것이다.

그게 들렸어요?
들리던데요.
아이고야.

잘 모르겠다. 내가 충분히 멀리 가지 못했던 탓인지, 생각보다 내 발성이… 괜찮았던 건지. 다만 타인과 나의 간격 사이에 시가 있다는 믿음. 그 믿음만은 분명해졌다. 타인에게 닿고 싶을 땐 확성기가 되어주고, 누군가 내 외로움에 침범하려 할 땐 벽이 되어주는 것. 그러니 내가 타인의 이야기를 잊은 것이 아니라 시 안에 체화된 것일 뿐이라고, 그렇게 생각해도 괜찮을까. 으아아아 크하하. 괴로움으로 시작해도 끝내 웃고 마는 이 우스꽝스러운 비명을, 시와 나의 간격이라 말해봐도 좋을까.

4
타인의 뜻은 다른 사람. 이별은 유화된 하나의 마음이 끝내 서로 다른 성질로 분리되는 현상일 뿐. 그러나 이별이 어려운 건, 그 마음이 마을처럼 커졌기 때문이겠지. 타인으로 시작했던 사람이 내 마음에 부족처럼 터를 잡았기 때문이겠지. 혹은 물질처럼 용해되어 이미 내 일부가 되어버렸기 때문이겠지.

5
산문을 끄적이는 동안 시인과 촌장의 <가시나무>를 많이 들었다. 내 속에 내가 너무도 많아 당신의 쉴 곳 없다는 가사가 새삼스레 아프다. 쉬고 있던 당신을 내쫓을 수밖에 없었던 내 외로움도 노랫말처럼 훨훨 날아갈 수 있을까. 아니면 쓸쓸한 외풍 되어 또다시 나를 시리게 할까 모르긴 몰라도, 내 마음에 무성한 가시나무를 철조망 대신 숲으로 읽어줄 사람 어딘가에서 걸어오고 있겠지. 부단히 만들고 있는 이 사랑채는, 어쩌면 한 사람을 위한 공간일 수도 있겠지.

  • 작가 윤병헌
  • 사진: 모두 윤시인이 직접 찍은 사진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