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드나무가 여름 햇빛으로 자신의 초록을 세상에 꺼내두는 사이 나도 장롱에서 여름옷을 꺼냈습니다. 반팔 몇 개를 몸에 대어 보며 올여름의 나는 작년 여름보다 팔이 조금 길어졌을까, 하는 사이에는 바다에 두 번 다녀왔습니다. 한 번의 바다에서는 지난 시간의 나를 후회했고 다른 한 번의 바다에서는 돌아갈 용기를 가진 사람이 후회도 할 수 있는 것이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불확실한 미래를 향해 발걸음을 떼는 일에 필요한 용기만큼 내가 남긴 발자국을 돌아보는 것도 비슷한 마음이 필요한 일이라 여기며 지냈습니다. 때로는 암담했지요. 내가 지나온 그 수많은 시간을 헤아릴 수 있는 게 고작 한 뼘 정도의 발자국뿐이라니. 문득 화가 나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노을 지는 해변에 앉아 내 발자국을 손으로 지워보았습니다. 지난 슬픔과 아픔은 이렇듯 손짓 몇 번에 사라지는 감정이구나. 버드나무가 내려주는 그늘처럼 거대하고 드넓은 사랑까지도.

유월 초여름에서 칠월의 완연한 여름으로 건너오는 동안 나는 적당한 마음을 가진 채 생활했습니다. 마음의 조도가 확연히 달라질 만큼의 격동적인 사건도, 감정을 몸 바깥으로 내보일 만한 순간도 많지 않았지요. 내가 오래 꿈꿔왔던 안정적인 생활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상했습니다. 불안하지 않아서 불안했습니다. 힘들지 않아서 힘들었어요. 어떤 일에도 아프지 않다는 게 아픔으로 다가왔습니다. 언제나 이렇게 살아가고 싶었지만, 정말 이렇게 무감하게 살아도 되나? 하는 생각이 머릿속을 어지럽게 했습니다. 어쩌면 지난 계절에 너무 많은 마음을 써버린 게 아닐까, 지금은 소진된 나를 다시 채우는 기간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만. 세상은 나의 온전한 회복을 기다려주지 않습니다. 사랑은 나의 모든 것을 품어줄 듯 다가왔다가 누구에게도 보이고 싶지 않은 마음만 헐벗긴 채 떠나갔습니다. 더는 둘러싸인 것이 없는 나의 마음 안쪽에는 사랑도 슬픔도 아닌 언제부터 들끓고 있었는지 모를 화가 있었습니다.

내게 화는 어릴 때를 제외하고는 언제나 선택할 수 있는 감정이었습니다. 마땅히 화를 내어도 되는 순간에 숨을 삼키는 것이 나의 기질 중 하나라고 여겼습니다. 그래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살아오며 내가 보았던 화는 모두 부정적인 일과 연관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바닥에 아무렇게나 깨져 있는 술병과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나던 사람과 참을 수 없어서 그르친 일들이 무수했거든요. 참을 수 없는 것은 사랑뿐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다 어느 날 키우던 화분이 죽고, 함께 살아가던 개가 죽고, 오래전 알고 지내던 사람의 부고 소식을 들었을 때. 나는 화가 났습니다. 삼킬 수도 있었지만 그러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혼자 있는 방에서 슬픔은 울분이 되고 웃음은 실소가 되었습니다. 왜 살아가야 하지? 라는 질문보다 왜 죽어야만 할까? 하는 질문이 머릿속을 맴돌았습니다. 그간 삼킨 화들이 온몸을 들끓게 했습니다. 또한
그것이 나를 오래 살아가게 하리라는 것을
나도 알고는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나는 술병을 치우지도
개를 좋은 곳에 묻어주지도
오래전 그 사람의 장례식에도 가지 못했습니다.
이런 순간 회상은 대부분 여름에 일어납니다. 오늘처럼 비가 오는 날이면 더더욱이요. 나는 날씨에 많은 영향을 받는 사람입니다. 추운 겨울날에는 손이 빨개져 있을 한 사람의 주머니에 핫팩을 넣어주고 싶어지다가도 종일 비가 오는 날이면 그 핫팩이 딱딱하게 굳은 채 쓰레기통에 버려질 모습을 상상하곤 합니다. 겨울에는 그림자로만 보였던 것이 여름에는 전부 그늘로 보입니다. 그렇게 바라보던 사람이 있었습니다만, 우리는 이제 너무 먼 곳에 있습니다. 우리라는 단어로 묶일 수 없는 만큼의 거리에 있습니다. 여름에는 우리보다 혼자라는 단어를 더 자주 씁니다. 무더운 날씨 때문인지 쓰는 말에도 거리감을 두게 됩니다.
우리 여름처럼 멀어졌던가요?
그늘이 되고 싶었는데 끝내 그림자로 남아
서로의 안 좋은 면에 밤새도록 밑줄을 그었던가요.

작년 여름에 자주 입었던 옷들이 왜인지 예뻐 보이지 않습니다. 새 옷을 몇 벌 사서 걸어두었습니다. 지금 집에서는 아무것도 키우지 않습니다. 선풍기는 온종일 돌아가고, 습기가 많은 방에서는 스멀스멀 곰팡이가 올라옵니다. 디퓨저를 하나 더 샀습니다. 하루에 향초를 두어 번 피웁니다. 창틀 청소를 했습니다. 마트에서 장을 보고 평소보다 먼 길을 돌아서 왔습니다. 뉴스를 잘 보지 않습니다. 사람을 많이 만났습니다. 술을 마시고 신세를 한탄하다가 정신을 차려보니 동이 트고 있었습니다. 능소화가 거리 가득 피어 있었습니다. 문학을 해야 하는데 생활을 해야 하는데 그러지 못하고 며칠은 누워 지냈습니다. 이 모든 일에 화는 없었습니다. 나는 분노하지 않았습니다. 나는 고작 나 사는 일에도 몰두하지 못했습니다.
분노는 하나의 큰 힘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몸을 기꺼이 움직이게 만드는 힘이 분노에는 있습니다. 화를 낼 줄도 알아야 한다는 말을 이해하지 못했었는데, 이제 조금은 알 것 같습니다. 나는 여기에 사랑이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것을 지키기 위해서 누군가는 그토록 소리치고 있다는 것을, 그의 그림자에 우거진 숲을 상상하며 나는 알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도 여름이 필요했을까, 할 말 못 할 말 다 꺼내게 만드는 뙤약볕 밑의 더위가 필요했을까요. 한바탕 땀을 흘리듯 마음을 쏟아내고 나면 뭉게구름이 잠시 해를 가려주었을까요. 나는 많이 어지럽습니다. 그간 내가 참아온 것이 화가 아닌 사랑일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에.
비가 그친 것 같아요.
오늘은 바깥을 나가 걸어볼 생각입니다.
- 작가 장대성

- 사진은 장시인이 올여름 제주에서 찍어온 사진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