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 좋은 생각 품고
머물다가 
떠나가는 곳

[발톱 세우기]를 여는 말

어느 날 사랑하는 사람이 나에게 그랬다. 고양이는 너무 행복하면 자기도 모르게 발톱을 세운대. 그날 이후로 나는 가끔 손가락 끝에 힘을 주었다. 그러면 손톱 끝에서부터 무언가가 자라 나와서 온 세상을 할퀸다. 숨기려고 드러내는 것이 있다는 사실을 이제 알았다.

연재를 시작하며 나는 어떤 표정도 짓지 않았다. 고심에 차 심각하다거나, 환희에 차 기쁘다거나, 그런 너울거림 없이 나는 다만 걸어가고 있었다. 바닥에 고개를 떨군 채 느린 걸음으로 길을 걷다가 보도블록이 움푹 패거나 부서져 있는 것을 보았다. 마치 거대한 고양이가 발톱을 세워 그곳을 까릅힌 것처럼. 어린애들은 뛰다가 넘어질 수도 있겠다, 자전거를 타고 달리다가 넘어질 수도 있겠다, 술에 취해 걷다가 넘어질 수도 있겠다. 나는 비정형적이고 위협적이면서도 이 세계에 비하면 작디작은 그 흠이 무서워서 계속 불안했다. 불안이 불안을 불러오고, 비가 오는 날엔 자기들끼리 세신을 하고, 바람이 부는 날엔 달싹 붙어 앉아 낙엽으로 몸을 덮으며, 흠 속에 세를 얻어 사는 동안 혹시 하는 마음에 나는 먼 길도 다녀와 보았다. 그러나 떨칠 수 없는, 요 녀석들을 꺼내볼까? 몰캉거리는 요 녀석들을 내 손으로 없애버릴까? 먼 길 위에서 내가 배웠던 것처럼 흠에 알맞은 발톱을 세워 단숨에 요 녀석들을 세상 밖으로 집어 던져 버릴까?

나는 아직도 그대로다. 나도 이제 녀석들 옆에 쪼그리고 앉아 있다. 녀석들의 집은 아늑한데, 나의 길바닥은 숨을 곳 없이 아득하다. 녀석들과 내가 서로에게 우리가 되는 동안, 시간은 잠자코 흘러가는가. 세상의 모든 흠을 내가 만든 것 같이. 손톱인지 발톱인지 알 수 없게, 나를 지키기 위한 것들이 길어져 우글거린다. 때로는 일제히 울고, 때로는 일제히 침묵하는 틈에, 나는 조금 사람다워졌다. 아주 조금씩 불안이라는 것의 뒷면을 들춰보고 있는 것이다.


1 : 빠진 발톱

친구야. 나 새끼발톱이 빠졌다. 시원했다. 달랑달랑 붙어 있을 때는 아팠는데, 원래도 없었던 것처럼 지금은 아무렇지 않다. 앓던 이가 빠진 것처럼, 재수 없던 인간이 내 인생에서 영원히 사라져 버린 것처럼. 분홍빛을 띠는 새끼발가락의 끝자락에서 나는 이제 뛰어내려도 좋겠다 싶은 기분까지도 들었어. 사람은 혼자일 때 과감해진다더니 아무도 없는 방 안에서 나는 마음껏 상상한다. 그리고 운다. 상상과 눈물이 뒤섞인다. 그런 걸 추억이라 하나 보지. 그러게. 많은 일들이 있었지. 정말 많은 일들이 있었어. 그렇지만 그 많은 일들을 하나하나 이야기하기 싫었다. 술이나 먹고 하루를 지우자는 식이었어. 그렇게 가을도 가고 겨울도 가고 해가 바뀌었다. 그런데도 오늘은 유독 추웠다. 이젠 마지막일까?

외로워서 시작한 것들을 외로워서 죽을 때까지 해야 한다면, 친구야. 나는 그것들에 이름이라도 붙여주고 싶다. 누가 한 움큼 베어 문 사과같이 마음 한쪽이 사라진 것 같아. 사라진 그 마음 한 조각에 서려 있던 너는 이름이 뭐였어?

나 대만 다녀왔다. 대만에 있는 동안 애인이랑 나랑 같이 많이 걸어 다녔다. 나는 느렸고 애인은 빨랐지. 우리 동네에도 있을 법한 육교의 철제 난간을 찍느라고. 매일매일 지는 해를 애써서 찍어보느라고. 부두에 정박해 있는 배가 흔드는 수면을 따라 흩어지고 모여들던 갈매기와, 그 갈매기들이 자맥질하며 주워 삼키던 윤슬까지도, 세심하게 찍어보느라고. 그 사이사이 새끼발톱도 빠질락 말락, 사랑도 있었고 외로움도 있었고, 여름은 당연했고, 겨울은 상상도 못했었는데. 어느덧 느린 걸음이 끝나고 뒤를 돌아보니 그랬던. 그럴 수밖에 없었던 나의 마음이 조용히 나의 뒤를 지키고 선 밤에. 추억을 추억으로 두면서도 나는 생각한다.

친구야. 네 이름이 도대체 뭐였어? 나 이제 글에서 거짓말 안 한다. 너의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 것도, 많은 일들을 지우고 싶었던 것도 정말이다. 거짓말하지 않으려고, 생각하지 않으려고, 거의 손가락이 가는 대로 타자를 치고 있다. 의미 없는 글자들의 행렬 위에 무엇을 가마 태울까 생각하면서도, 그 무엇이 생각나기도 전에 앞서가는 글자들의 행렬을 나는 어린아이처럼 뒤쫓고 있을 뿐이다. 그것도 아주 빠르게. 그리고 마침내 그 글자들이 도착한 곳에서, 오늘 먹은 음식을 다 소진한 나의 체력이 헐거운 숨을 내쉬고 있겠지란 상상만이 나를 조금 웃게 할 뿐이야.

나는 글을 잘 고치지 않는 습관 때문에, 내 삶도 잘 고쳐지지 않을 것이라는 예감을 쉽게 했다. 그리고 그 예감은 오늘까지도 틀리지 않았다. 크게 바뀐 것도, 크게 좋아지거나 나빠진 것도 없이 이렇게 산다. 마음이 부자였다면 차릴 감정도 넉넉했을까. 모르겠다. 나는 그저 마음에 부목을 대듯 글을 써보자는 것이지만, 다시 보자는 긴 약속은 못 지켰던 것처럼 나 여전히 너에게 닿지 못하고 있다. 간혹 전하고 싶을 때, 전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을 뿐이라고. 친구야.

그래도 너에게 보여주고 싶은 게 있어. 아직 어떤 풍경 속에서도 찾지 못했지만. 그것을 발견하면, 발견할 수 있을 정도로 내가 괜찮아지면, 꼭 보여주고 싶은 것. 너를 잃었다는 사실. 난 눈부신 그 사실을 언젠가 아주 근사하게 너에게 부쳐주고 싶다.

  • 글과 사진 김웅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