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친구 조해민이 선물한 입체그림 ‘팽나무 혼인잔치’를 계기로 쓰여진 글

모든 이들은 하나의 풍요로운 세계를 품고 있다고 믿는다. 그 세계는 그 사람이 경험한 모든 순간과 엮여 있을 테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어디에서, 누구와, 어떤 시간을 보내고 있지 하는매 순간이 문제가 된다. 그래서 나는 그 순간을 어떻게 사는지 결정하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그 순간이 다음의 시간들을 결정하기 때문이다. 그 결정 기준엔 여러가지 키워드들이 있다. 사랑, 우정, 진심, 관계, 자연, 예술 등. 이 기준들을 조합해 보면 다양한 삶의 순간들이 탄생한다. 가족과 보내는 혹은 가족을 위한 시간, 친구들과 보내는 혹은 친구를 위한 시간, 자연에서 혹은 자연을 위해 보내는 시간, 자연과 더불어 사랑하는 사람들과 보내는 시간, 예술이 깃든 시간, 사랑하는 사람들과 예술을 향유하는 시간 등이다.
순간의 질을 결정하는 주 요인 중 하나는 어떤 장소, 사람, 예술 등이 내뿜고 있는 메시지이며, 다른 하나는 내가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이는가 하는 것이다. 최근 내가 경험한 최고의 순간 중 하나는 우리집에서 일어났다. 내 짝꿍 도형의 생일에 친구들이 모였고, 친구 중 한 명이 직접 만든 터널북을 선물했다. 그 책은 짝꿍과 나의 혼인잔치 풍경을 담고 있었다. 그 안엔 우리의 지난 소중한 순간이 세심하게 담겨 있었다. 600년 팽나무를 배경으로 깃대놀이가 벌어지고 있었으며, 그 앞엔 친구들이 훌라를 추고, 수라갯벌에 사는 생물의 모자탈을 쓴 풍물패가 공연을 하고 있는 풍경이었다. 짝꿍과 나와 우리의 반려견 해리도 있었다. 삶 전체에 감사하리만큼 행복했던 그 순간이 다시 한번 우리집에 다른 형태로 등장한 순간이었다.

나는 친구가 선물한 그 아름다운 입체그림이 뜻밖에도 무척 생태적이라고 느꼈다. 생태는 생명체 간, 생명체와 환경 간의 상호관계에 대한 개념이다. 이 그림이 우정, 사랑이라는 관계가 세심하게 얼키고 짜여 만들어졌고, 터널북 고유의 여러 겹으로 구성된 층층의 화면은 켜켜이 쌓인 여러 모양의 시간들 같았으므로 그렇게 느꼈으리라. 나는 이 선물에 대해 친구와 좀 더 애기하고 싶었다. 그 친구의 이름은 조해민이다. 나는 해민에게 인터뷰를 요청했고, 그녀는 기꺼이 응해주었다.

지연: 저는 해민 보면 생활예술인이란 말이 절로 떠올라요. 공연만 즐기는 것이 아니라 악기 연주도 하시고, 전시만 보는 것도 아니고 그림도 그리고 이렇게 터널북도 만들고, 목공도 하셨잖아요. 이 책은 최근에 시작하신 걸로 아는데 계기가 있었나요?
해민: 제가 생활예술인까지 되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일 말고 표현할 수 있는 무언가를 계속 찾아왔어요. 그런데 그 중 과한 무언가를 들여오는 취미들은 제게 좀 맞지 않았어요. 예를 들면 목공 같은 경우도 그렇고요. 영상도 경우에 따라서는 많은 자본과 사람이 필요하죠.
그런데 터널북은 제가 갖고 있는 재료로 작은 세계 하나를 만든다는 게 재미있었어요. 그래서 시작하게 됐고 친구들한테 선물하는 재미도 알아가게 돼서 앞으로 좀 더 오래 하게 되지 않을까 싶어요.
지연: 이번 도형 생일 선물로 해민이 만들어주신 이 그림은 저희 팽나무 혼인잔치 풍경을 담고있어요. 그날의 장면을 터널북의 테마로 고른 이유가 있으신가요?
해민: 하제 팽나무 혼인잔치는 저에게도 무척 특별한 경험이었는데요. 내가 사랑하는 친구들에게 가장 행복했을 장면이 무엇이었을까를 떠올려보니 도형에게도, 지연에게도 팽나무 혼인 잔치가 그럴 거라고 생각을 했어요.

지연: 그러게요. 제가 이거 보고 눈물이 났는데, 왜 눈물까지 났나 생각해보니 먼저는 이 정성에 감탄했던 것 같아요. 그리고 우리 부부에게 무척 소중했던 순간을 사랑하는 사람들과 누렸고, 그들의 마음에도 그 순간이 남아 이렇게 사랑스러운 무언가로 이어지게 됐구나 하는 마음도 있었던 것 같아요.
해민: 저한테는 최고의 찬사였죠. 무척 기뻤고요. 그런데 왜 울까 하는 생각이 들긴 했어요. 전에 다른 친구에게도 입체그림을 선물해줬는데 그 친구도 똑같이 울었거든요. 마음을 들여서 고르거나 만든 선물이라는 물건에 마음이 붙은 채로 그 사람에게 가 닿았을 때 느껴지는 무언가가 있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어요.
또 일상적으로 우리가 어떤 공간, 순간에 있을 때 주변의 모든 요소들이 한 번에 느껴지는 경험이 그렇게 많지 않잖아요. 그런데 터널북은 의도적으로 그것을 손안의 작은 세계로 구현을 함으로써 현전시키는 힘이 있는 것 같기도 해요. 그래서 받은 사람에게 소중한 순간이 담긴 책을 봤을 때 감동으로 이어지지 않았을까 해요.

지연: 맞아요. 나에게 소중한 순간이 친구의 마음과 정성을 통해 다시 재현되는 건 큰 부분인 것 같아요. 이 입체예술작품을 만들 때 가장 신경썼던 점은 무엇이었을지도 궁금해요.
해민: 터널북도 북이라는 이름을 갖고 있으니 결국엔 책이지만 우리가 흔히 펼쳐보는 책이랑은 다른 매체에요. 그렇다면 이 터널북을 책으로 만드는 건 뭘까 라고 했을 때 저는 ‘이야기’라고 느꼈어요. 그래서 이 책의 장면을 구성할 때 하나의 이야기가 느껴질 수 있도록 구성을 하려고 해요.
제 선물의 주제는 ‘흥’이었어요. 그날 비가 오는 와중에도 정말 모든 사람들이 흥에 넘쳐서 춤을 추며 진한 감정을 느꼈던 것 같은데요. 600년 수령의 팽나무 입장에서 보았을 땐 자신의 기다란 시간 속 찰나의 순간이었겠죠. 그 순간에 팽나무가 흥에 취한 우리들을 지켜보고 있다는 감정이 가장 강렬했어요. 그 감정을 그림을 통해 전하고 싶었어요.

지연: 생태철학자 티모시 모튼은 “모든 객체는 그 객체에게 일어난 모든 것을 기록한 놀라운 고고학적 기록”*이라고 말해요. 이 말에 크게 공감이 돼요. 그 객체는 해민이나 저, 심지어 그림도 될 수 있죠. 반대로 우리는 기록 그 자체이면서 다른 객체에게 어떤 기록을 남기는 존재가 될 수도 있어요. 해민은 주변에 어떤 기록, 흔적을 남기는 사람이 되고 싶나요?
해민: 제가 작년에 방에다가 친구들의 행사 포스터 같은 걸 하나하나 붙이기 시작했는데요. 지연의 야생신탁/ 민선의 물살이/ 세미의 영화 포스터 이런 것들이요. 굉장히 벅차오르더라고요. 또 내가 하는 작업에 친구가 참여하고, 친구들 작업에 내가 참여하고 이런 일들이 생기면서 우리가 서로의 기록이 되어가는 게 아름답다고 느꼈어요.
저는 이 질문이 친구들에게 어떤 사람이고 싶어? 라고 읽히기도 했는데요. 저는 친구들에게 계속 영감을 주는 사람이고 싶어요. 그래서 만날 때 항상 해줄 이야기가 있고 더 새로운, 재미난 것들을 물어보고 그래서 더 즐겁게 해주는 사람이요. 주변 친구들이 갖고 있는 크고 작은 다채로운 창조성들이 있잖아요. 그것에 주목을 하고 그것을 내가 다시 이야기를 함으로써 어떤 증폭을 만들어내면서 그 이야기를 세상에 더 크게 들려주며 쌓아나가는 그런 것들을 앞으로도 많이 하고 싶어요. 그래서 이 인터뷰를 청해준 지연에게도 고마웠어요.
*Timothy Morton, 안호성 역, 『실재론적 마술: 객체, 존재론, 인과성』, 갈무리, 2023, 190쪽

사랑과 우정을 기반으로 서로에게 보다 창조적인 영향을 주고받으며 만들어가는 순간들.
내가 가지고 있는 재료들로 만드는 일상의 예술. 주변 사람들에게 영감을 주고 싶은 마음과 그
마음에 조응하는 관계들. 해민의 ‘팽나무 혼인잔치’ 그림엔 이런 것들이 녹아있다. 이 충분히 생태적이지 아니한가?
- 글과 사진 제공 박지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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