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지를 쓰고 싶지만 이름도 주소도 모르니까, 나는 그저 이 밤을 편지지처럼 접습니다. 반으로 접힌 밤은 그렇지 않은 밤보다 더욱 깊은 어둠을 가졌듯, 무언갈 접는다는 건 정말이지 기억에 남을 만한 일이라 생각해요. 자국이 남고 되돌아갈 수 없단 사실까지 깨달아버리면, 고개를 들 수 없습니다. 반으로 접힌 종이처럼 고개를 푹 숙이고 가슴팍에 드리운 어둠을 바라볼밖에요.
김해경의 산문집 <뼈가 자라는 여름> 일부 발췌, p.52
사진 원지혜
5월초에 [나에게 쓰는 편지] 행사를 진행했는데 물론 ‘나 자신’이 아니더라도 누구에게나 써도 되는 것. 그러나 시간은 꼭 11시에 손님이 도착하시도록 했다. 그 이유는 계동길이 아직은 북적이지 않고(그 직후는 직장인들이 쏟아져 나온다) 체리암에 천천히 걸어 올라오면서 누구에게, 무엇을 쓸까 생각하며 오는 것 자체를 즐기시라는 것이 기획 내용에 포함된다.
어린이날과 어버이날을 꼭 염두에 두고 행사 날짜를 정하지는 않았고 팥이 지킴이를 할 수 있는 때로 정했던 것인데, 나중에 보니 아주 적절했다. 편지손님들이 가족에게 편지를 쓰고싶어했고 편지 쓰는 시간 동안 ‘미움보다 사랑을 키웠어요’라는 감동적인 말씀도 남겼다. 시인이 이런 기분일까? 내가 내놓은 생각보다 감동을 몇 숟가락 더 얹어 돌아오는 마디를 들었을 때.
팥은 이러한 편지쓰는 행사에 두어 번 가본 적이 있다. 둘 다 서촌이었는데 운경고택과 무서록에서 각기 훌륭한 시간을 보냈다. 첫 번째 편지: 한옥 툇마루에 앉아 소반에 편지지를 두고 쓴 것은 스웨덴 친구 엘린에게 우리의 20년 넘은 우정을 정겹게 담아봤다. 두 번째 편지: 누군가의 작업실이었던 백송 터 근처 전시공간(참, 이태준의 <무서록>을 읽어봐야겠군)에서는 2024년 체리암을 시작하면서 힘들었던 일들에 대해 내 자신을 다독이며 다시 다짐하는 편지를 썼다. 사실 시간적으로 전혀 여유가 없는 날이었는데(편지쓰자마자 서울역가서 기차를 타야했던 시간표) 그 공간에 들어선 순간 내게 꼭 편지를 써야만 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그렇게 하길 잘했다. 지금 이 행사도 탄생했으니.
5월5일의 편지손님은 올해 2월의 엄세림 작가의 목공 전시 때 체리암을 처음 방문한 분. 그 이후 몇 번 만나 서로의 인생이야기를 나눠봤다. 요즘 새로운 출발을 앞두고 열심히 살고계신 모습이 무척 어여쁘다. 다음은 그 분의 정성어린 후기를 감사한 마음 담아 올린다.
팥.
4일 행사 중 마지막 날인 오월오일에 신청을 하였다.
고즈넉한 한옥에서 오롯이 [나에게 쓰는 편지] 생각만 해도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마침 엄마의 생신과 조카의 어린이날을 맞아 저녁에 가족모임이 있었다. 편지의 대상을 나에게서 가족으로 돌리니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오늘 총 3통의 편지를 써야겠다 생각하고 두분의 선생님을 위한 어른이날 선물을 준비해 체리암에 갔다.
체리암에 도착~ 대표님께서 기획하신 편지지가 정갈하게 세팅되어 있었다. 편지지 디자인이 3가지라니 편지지를 보는 순간 각각 디자인에 맞는 대상이 떠올라 좋았다!
대표님께 기획 의도를 듣고 내어주신 따뜻한 차를 마시며 엄마, 조카 그리고 나에게 편지를 썼다. 한옥이 주는 편안함과 따스한 온도가 편지를 쓰는 동안 집중하기에 충분했다!
점심을 제안해 주셨던 대표님. 채식을 하시는 두 분과 채식을 좋아하는 나. 체리지기 기술자님을 따라 야무지게 쌈도 싸먹고, 처음 먹어보는 달래 페스토와 비건빵도 새롭고 맛있었다!
풍류. 용기. 나눔이 있는 [문화거실 체리암] 좋은 공간에서 좋은 의도로 좋은 분들과의 만남이 삶을 더욱 풍성하게 만들어 준다 초대해 주시고, 귀한 식사까지 참 감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