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렇게 시작해보려 한다. 봄은 견디어 와서 견주어 가는 것. 견딤과 견줌 사이의 찰나를 인연이라 한다면, 그 같은 사건은 흩날리는 꽃잎과 머리 내미는 잎사귀의 짧은 악수와 퍽 닮았겠다고.

나는 지금 한산한 골목에 아무렇게나 놓여 있는 의자처럼 멍한 눈빛으로, 그러나 수심을 알 수 없는 눈빛으로 모든 것을 물끄러미 건너보고 있다. 사람들의 웃음소리, 울음소리, 거짓말 같겠지만 섞여 들려오고 누군가의 작별과 또 누군가의 만남을 기꺼워하는 이 순간에 봄은 시나브로 내 마음에 콱 들어앉아선 내뺄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나는 이 시간이 불편하다. 다시 잃음을 감각하게 될 것이란 기정사실이 불편하다. 마음은 너무 유순해서 세도 받지 않고 방을 내어주는 것이겠지만 마음을 따라 여기까지 쫓아온 몸은 금세 눈을 홉뜨고 두 손을 힘껏 오므린다.
한두 번 있는 일도 아니었지. 우리 부모님은 맞벌이셨다. 그래서 학교 수업이 끝나고 집에 가면 아무도 없었다. 집에 혼자 있는 게 싫어서 종종 엄마와 아버지가 일하는 공장에 갔다. 여기저기 돌들이 굴러다니고 흙덩이가 움푹 팬 비포장도로와 회색빛 담벼락이 길게 이어져 있는 그곳의 풍경은 나에겐 또 하나의 이세계였다. 엄마와 아버지는 그곳에서 자동차에 들어갈 부품을 만든다고 했지만, 내 눈엔 가끔 당신들도 부품처럼 느껴져서 애달팠는데, 간만에 허리를 펴고 한숨을 내쉬는 아버지의 등 뒤로 피어오른 보라색 담쟁이꽃을 봤을 땐 이게 무슨 기막힌 사연인가 싶었는데, 마음은 그때도 문을 활짝 열었다. 담쟁이꽃은 인사도 않고 아버지 손도 잡지 않고 엄마의 무거운 어깨를 콕콕 밟으며 그 문을 통과해 들어오는 것이었다. 그때 나는 새로운 단어를 발견했다.
치밀다―
오 치미는 아름다움. 오 치미는 슬픔. 그래 치미는 기쁨이여 치미는 문학이여. 치미는 생활이여 치미는 아버지여. 치미는 우리 엄마. 어떤 말과 사람과 마음과 역사를 갖다두어도 괜찮을 것 같은 ‘치밀다’를 손에 쥔 나에게 마음은 그것이 자신이 건네준 하나의 작은 호구지책이라 말했다. 마치 어린 손자에게 장난감 건네듯 인생의 슬기를 건네는 할아버지처럼. 물론 나에겐 할아버지가 없었지만 동화로 영화로 익히 들어온 할아버지의 효용을 나도 한 번은 거머쥐게 된 순간이었던 것. 그 봄날 이후 내 슬픔은 한고비를 넘긴 마냥 가벼이 지나가고 있었다.
서울로 올라오게 되었을 때, 그 봄이 한 번 더 왔었다. 까꿍, 하고 나를 놀리듯 슬퍼대던 봄은 눈을 질끈 감았다 떠도 사라지지 않고 비칠거렸다. 몇 번의 눈과 비를 쏟더니 꽃과 잎사귀를 동시에 틔우는, 매사에 성격이 급한 소년처럼 그것은 겨울과 여름의 간격을 조금씩 줄여 놓고 있었다. 왜 가지 않니? 물어봐도 대답 없는 그것은 다만 꽃이 떨어질 때 비를 함께 떨어뜨리고 잎사귀가 피어날 때 눈서리를 함께 틔웠다. 견디고 견주고 신나는 리듬 속에 나는 이미 정신이 혼미해져 있었다.
이제 글 같은 건 그만 쓰자는 선언을 여덟 번째 반복하던 때였다. 이번엔 연례행사가 아니라 진짜 아주 굳게 다짐했기에 마음도 수그러들어 문을 쉽게 열지 않았다. 그렇게 볕 하나 들지 않는 방에 누워 유유자적하던 날이었다. 지금 하는 일도 적성에 맞아. 사람이라면 자못 몸을 써야지. 김수영이 온몸으로 밀고 나아가라 했으니 온몸으로 온몸을 잊을 만큼 일을 해버리는 거지. 그렇게 하루하루를 다독여가며 나의 생활은 그림자를 벗어나고 있었다. 이제 아무도 나보고 뭐라 하지 않을 거야. 책은 취미로 읽으면 돼. 노래를 취미로 하듯이. 글도 취미로 쓰면 돼. 노래를 취미로 하듯이. 흥얼거리며 나의 생활은 나조차도 벗어나고 있었다. 나는 원래 싫증을 잘 내는 사람이니까. 조금 힘들 수 있어. 그렇지만 이런 감정도 잠깐일 거야. 견디다 보면 봄이 올 거야. 봄이 오면 모든 게 달라져 있을 거야.
그 말이 화근이었지. 그 말이 나를 다시 열었지. 봄은 이제 이렇게도 말하는 것 같았다. 사람은 원래 슬픈 거야. 아니 그건 백석이 한 말이었어. 이젠 내가 말하는 거야. 아니 나는 널 믿지 못하겠어. 이젠 믿을 수 있을 거야. 그래봤자 넌 또 떠날 거야. 난 항상 네 곁에 있어. 네가 날 벗어났다고 확신하는 그 순간조차도 나일 거야. 그래서 왜 슬퍼야 하는 건데? 너는 그런 사람이야. 너는 그런 운명이야.
나는 탓할 수 없는 슬픔을 지닌 존재. 봄은 견디어 오고 견주어 간다. 오고 가는 사이에 나는 탓할 수 없는 슬픔을 지닌 존재. 그렇게 말하는 사이에 슬픔은 견디어 오고 견주어 가는 것일까? 때론 문학을 한다는 것이 운동처럼 생각된다. 지탱하고 화해하고 승리하며 자주 패배하며 외롭고 그리운 영광, 그보다 더 그리운 낭만, 그럼에도 다신 오지 않을 이세계를 위하여 내가 문학을 한다는 건 필경 운동일 것이기 때문이다. 땀 대신 눈물을 흘리고 몸 대신 마음을 쓰고 힘을 주는 것들보다 힘을 받는 것들에 눈길을 건네고 어쩌다 어정쩡― 곁에 껴 있기도 한 물끄러미 존재가 나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봄은 다 알고도 내가 깨달을 때까지 숨어 있다가 기도라도 들은 양 나선 것이었을 테다.
발각된 봄이여. 나는 너의 역사를 안다. 나의 마음에만 드나들던 너의 마음엔 수많은 비명과 참혹과 그리움이 도사려 있다는 사실을 안다. 그래서 부끄럽다. 그래서 어떤 시간은 아깝다. 그래서 모든 시간은 슬프다. 우리는 그런 존재로 살아온 것이다. 역설인 봄이여. 그럼에도 언제나 너는 스스로를 모르지. 너는 언제나 사랑이란 것을. 그래서 자랑스럽다. 그래서 어떤 시간은 아깝다. 그래서 모든 시간은 귀하다. 우리는 그런 존재로 너를 받아들여 온 것이다.
그러니 이제 너를 열어라. 우리가 그 속에서 살겠다. 깊숙이, 깊숙이 살겠다.
<물끄러미 건너가기> 봄의 산문
- 작가 김웅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