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 좋은 생각 품고
머물다가 
떠나가는 곳

정선의 정물화 강연을 계기로 처음 체리암 한옥을 방문했다. 대문을 지나 마당의 기단에서 신발을 벗고 들어가면 아담한 거실이 있고 오른편 미닫이 문을 열고 닫으면서 공간을 분리할 수 있다. 그 날의 강연에는 정선의 그림들이 한옥 내부의 흰 벽면에 투사되도록 공간을 구성했다. 그림 강연을 계기로 만난 체리암을 가꾸고 있는 기획자 팥과 많은 이야기를 나누면서 11년 전에 처음으로 만들었던 그림극 <자장가>를 재공연하는 프로젝트가 나오게 되었다.

<자장가>는 2014년 7월 11일부터 13일까지 강릉 봉봉 방앗간이라는 카페의 2층에서 기획했던 그림(자)연극이다. 당시에 나는 프랑스에서 영화공부를 하는 중이었는데 7월에 강릉에서 <자장가>를 올리기 위해 4월 초부터 한국에서 지내고 있었다. 그 해 4월에는 인천에서 제주로 향하던 세월호가 침몰하는 참사가 일어났고 11년이 지났지만 제작과정 내내 그 때의 충격과 슬픔과 맞물려 지금까지도 기억이 생생하다.

어린이와 어른이 함께 볼 수 있는 세 편의 단막극으로 만들어진 <자장가>에는 초록빛 고양이, 꿈꾸는 애벌레 그리고 암각화 속의 고래가 등장한다. 첫번째 이야기 ‘달빛노래자랑’ 에 등장하는 초록빛 고양이는 당시에 키우던 고양이 나누크가 모델이었다. 당시 제작 일지의 내용이다: “새끼 고양이를 키우면서 그가 빛의 움직임과 그림자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는 어떤 사물에 빛이 투영되었을 때 유사하지만 다르게 나타나는 상을 경이로운 눈빛으로 바라보곤 했다. 나는 그림자를 활용하여 고양이가 놀 수 있도록 다양한 형태와 움직임을 만들면서 많은 시간을 보냈다. ‘달빛노래자랑’은 고양이의 호기심을 감각적으로 탐구하는 과정.”

실제 나누크는 검은 고양이지만 그림에는 숲의 색을 입혔다. 초록빛 고양이가 밤이 되어 홀로 남게 되자 밤 하늘의 달이 안내하는 음악공연으로 이끌리는 이야기이다. 혼자만 깨어 있는 것이 아님을 알게 되고 어두움 속에서 꽃, 곤충, 부엉이 등을 만나게 된다. 이 장면들을 움직이는 그림으로 만들었다.

무성 영화처럼…
2014년에 나는 그림으로 제작된 실험영화에 나타나는 개인의 목소리 표현을 주제로 석사논문을 쓰고 있었다. 필름으로 제작된 실험영화와 무성영화에 매료되었던 때이기도 했다. 초창기 영화는 스크린과 사운드트랙이 분리되고 소리와 음악을 라이브로 연주하는 형태로 관객과 만났다. 따라서 영화의 체험은 본질적으로 스펙타클의 체험이었다. 그 점을 참고하여 <자장가>에서는 이미지와 소리를 분리하여 제작하는 것을 시도했다. 두 에피소드는 “빛으로 그린 그림”처럼 그림자를 맺히게 하여 장면을 만들었다. <자장가>의 재공연은 2014년에 시도했던 실험에 대한 기억을 찾아가는 과정이자 새로운 공간을 탐구하는 시간이 될 듯 하다. 아담한 내부공간, 마당을 통해 하늘로 열린 외부 공간이 배경이 되는 무대와 초록빛 고양이가 다시 만나게 될 밤하늘, ‘달빛노래자랑’을 상상해본다.

누구든 실시간으로 영상을 촬영하여 주고 받을 수 있는 시대에 필름의 잔상은 박물관으로 가거나 추억으로 남았다. 수많은 시각물 속에서 움직이는 그림이 신기하거나 ‘경이’의 대상이 되기는 힘들 수도 있다. 그럼에도 어떤 빛을 투사하여 이 고요한 한옥 공간을 들썩이게 할 지, 행복한 고민이 시작되었다.

  • 작가 김지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