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느날 오후, 지인을 만나러 가면서 계동길을 산책하게 되었다. 서울에 살고 있지만 창덕궁 옆 동네를 걷는 잠깐의 시간 동안 ‘여행자’가 된다. 손뜨개질로 만든 옷가게, 여행 서점, 고양이를 테마로 하는 전시장, 카페, 분식집, 파스타집, 악세사리 가게, 기념품 매장, 아이스크림집. 각자의 주제와 색깔을 뽐내는 공간들 사이를 천천히 걸으면서 들뜬 마음을 갖는다.
작은 골목길로 우회하여 창덕궁 방향으로 가까워지면 아주 오래전 처음으로 연극 무대에 섰던 극장이 머릿속에 떠오르고 그 때의 만남과 헤어짐의 장면들이 잠시 동안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더 좁은 길 계단을 지나면 첫 서양화가를 기념하는 미술관, 궁중요리를 연구하는 곳, “담장을 넘는 예술가들”을 맞이하는 한옥 살롱 등 역사적 시공간을 기억하려는 사람들과 동시대의 분주함이 뒤섞이면서 감각을 유혹하는 사건이 만들어지는 듯하다.
여행자의 일탈의 감성에 머물며 걷다가 한옥이 오밀조밀 붙어 있는 언덕길 곳곳에서 멈춘다. 그리고 맞은편 인왕산과 가장 잘 어울리는 나만의 최고의 풍경을 선정해보면서 잠시 휴식의 시간.
한옥은 나에게 어린 시절의 추억을 불러일으키는 곳이기도 하다. 조부모들께서 모두 오랜 기간 한옥에서 지내셨고 명절 모임은 ‘한옥집 가는 날’로 여겨졌었다. 사촌들과 모의하여 공간 전체를 놀이터로 최대한 활용해보려고 시도했던 시간은 언제나 그리운 기억이다.
이어 만남의 장소인 체리암 한옥에 도착했다. 해질 무렵의 빛이 서서히 바뀌는 것이 실시간으로 느껴진다. 바쁜 일상과 현실의 복잡다단함으로 되돌아가기 전의 의식 같은 순간. 이 곳은 광화문, 경복궁, 창덕궁 등 과거 역사의 시공간이자 여행지이지만, 동시대의 목소리를 담은 광장에서도 멀지 않다. 광장의 음악과 시민들의 강력한 함성이 앞마당에까지 전해진다.
- 작가 김지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