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 좋은 생각 품고
머물다가 
떠나가는 곳


계절산문 [식단표]를 들어가며

날짜는 몸으로 겪고 계절은 마음으로 통과하는 중입니다. 그런 이유로, 새해와 입춘 중 어느 쪽을 시작이라 부르면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불 꺼진 거실에 앉아 지난날을 펼쳐봅니다. 쉼 없이 내리던 봄비도 조금씩 잦아들고 있습니다. 용액을 흘려야 숨겨진 문장이 드러나던 편지처럼, 어떤 기억은 슬픔으로 번진 뒤에 추억이 되겠죠. 하지만 들키고 싶지 않던 마음을 열어볼 자신이, 오늘의 내게는 없는 듯합니다.

그런 이유로, 늘 그래왔듯 계절과 음식에 빚지려 합니다. 계절 속에 숨긴 마음을 토하기 위해 많이 먹어볼 요량입니다. 그렇게 넓어진 식견(食見)을 통해, 시작을 망설이는 당신의 밥친구가 될 수 있다면 참 좋겠습니다.

인생보다 긴 어제*였지만, 눈을 뜨면 하루아침에 끝나버린 것들뿐이었다. 누군가 벚꽃 보았냐고 물어봐서 벚꽃이 졌다는 것을 알게 됐다. 벚꽃은 보았지만 벚나무를 보지 못했어요. 딱 그 정도의 슬픔. 계절보다 계절감이 오래가듯 축을 잃은 마음으로 나를 설명해야 하는 나날들이 두려웠다. 어떤 벚나무는 만개한 뒤 흩어지는 순리를 겪겠지만, 어떤 벚나무는 놓쳐버린 꽃잎과 초라해진 몸으로 한때의 흐드러짐을 증명해야 하니까.

그리고 비가 내렸다. 꽃잎이 담긴 구덩이에 봄비가 고여 웅덩이를 만드는 동안, 웅덩이를 만들기까지 조금씩 약해지던 도로를 상상했다. 나 또한 움푹 주저앉은 마음 위로 수많은 발자국과 날씨가 배어있겠지. 그렇다면 그 마음에 들어찬 감정이 슬픔인가, 마음 자체가 슬픔인가. 알 수 없지만 행인들은 전시품을 대하듯 웅덩이를 피해 걸었다. 이 작고 얕은 수렁이, 그래서 내 작품인가 싶기도 했다. 내 작품으로 밥 벌어먹고 살 수 있을까, 중얼거리던 한때로부터 나는 얼마나 멀어진 걸까. 그러자 꽃잎이 밥알처럼 보이고 그 위로 떨어지는 봄비가 육수처럼 느껴지고… 차즈케를 먹고 싶다는 생각이 그래서 문득 들었던 것이다.

3년 전 어느 시인과의 대담 중, 시인은 식사에 관한 견해를 밝힌 적이 있다. 배달음식은 어딘가 전자기기의 급속충전 같은 느낌이 있어, 힘이 닿는 한 직접 차려먹으려 한다고. 재료 준비부터 설거지까지의 번거로움 또한 결국 나를 위한 일이라고 시인은 말했다. (그 행위와 사유를 나아가 ‘쓰기’에 입혀야 한다는 것을 그때의 나는 알지 못했다. 구성과 퇴고는 창작자로서의 ‘나’가 아닌 독자로서의 ‘나’를 위한 과정이니까.) 시인의 철학에 감복했던 나는 그 이후로 제법 많은 음식을 만들어 먹었다. 며칠 뒤엔 그 음식들을 시로 지지고 산문으로 볶고… 하여간

그런 이유로, 무언가를 먹고 싶다는 생각은 그것을 만들어야겠다는 생각과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생각과 달리, 3년 전의 나와 지금의 내 상황은 많이 달라져있었다. 타지에서 홀로 지내던 시절을 지나 지금은 가족과 함께 사는 중이며, 엄마는 내가 부엌에서 얼쩡거리는 걸 굉장히 싫어한다. (지금 생각해 보면 얼쩡거림 그 자체를 싫어하는 것 같기도…) 그렇게 나는 부엌과 점점 멀어지게 됐고, 멀어짐은 손끝을 망설이게 만들었다. 공간을 돌보지 못하면 내가 지나온 시간도 밀키트처럼 간편한 문장에 담기겠구나. 두려웠다. 소분하여 얼려둔 마음이 오래전부터 해동을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글을 쓰자.

차즈케를 먹으러 가는 길. 차즈케는 밥 위로 녹차나 육수를 부어 먹는 일본의 가정식이다. 가정식을 먹기 위해 식당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어딘가 이상했지만, 계절과 계절감의 관계가 그러하듯 공간보다 중요한 건 공간성일 테니까. 다만 계절감은 나를 외롭게 하며 공간성은 나를 회복시켜줄 것이라는 믿음. 그 믿음만이 중요했다.

요리명을 넘어 그것이 생활 방식을 품고 있다는 점에서 차즈케가 좋았다. 차즈케는 에도 시대, 바쁜 서민들이 밥에 물이나 차를 부어 먹는 생활로부터 시작됐다. 밥과 차가 한 그릇에 공존할 수 있다는 사실도 신기했지만, 한 사람의 생활이 차의 성격을 바꿀 수 있다는 점에서 나는 지난날을 헤아릴 수밖에 없었다. 나를 산책자로 만들어주었던 외로움이 언젠가부터 보이지 않던 순간을. 손끝에서 쉬고 있던 심장을 발목에 걸어두게 된 새벽을. 내 생활이 외로움을 괴롭게 만들었다는 것을 그래서 알게 된 것이다.

점심때를 조금 지나서였을까, 식당의 손님은 나뿐이었다. 식당은 ‘ㄷ’자 형태의 바 테이블로 이루어져 있었고, 그러한 공간성을 빌려 요리사와 나는 제법 많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어쩌다 이곳에 오게 됐냐는 요리사의 물음과 어쩌다 이곳에서 이야기를 만들게 됐냐는 나의 물음이 번갈아 이어졌고, 서로의 답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생활이 이끄는 대로 왔기에, 이제는 생활을 이끌고 싶은 마음이었다고.

식사를 마치고 나선 조금 걸었다. 꽃잎도 흩날리지 않고 비도 내리지 않고, 다만 봄볕이 쏟아지던 4월의 어느 날. 차즈케는 그 유래에 담긴 다급함과 달리, 차가 지닌 성질과 성분 덕에 가벼운 한 끼로 많이 먹는다고 요리사는 말했다. 지금껏 가벼움은 나를 덜어내야만 얻을 수 있다고 여겼는데, 충족의 형태로 가벼워질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그 순간을 충만함이라고 부를 수 있다면, 이제 내 안에 들어찬 가벼움을, 내가 오해한 감정들을 소화할 시간이겠지.

* 홍지호, 「화요일 – 조성」

글과 사진 윤병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