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 좋은 생각 품고
머물다가 
떠나가는 곳

잠깐 안동에 산 적이 있다. 내가 살던 동네는 안동댐 하류 인근으로, 독립운동가 이상룡의 생가인 임청각과 멀지 않은 곳이었다. 안동에 내려가기 전부터 낙동강과 주변 산세에 반해 있던 나는 매일 아침 산책에 나섰다. 임청각에서 시작해서 낙동강 변을 따라 안동댐을 지나서 쭉 올라가 월영교까지 가서 강을 건넌 후 숲을 왼쪽에 두고 다시 강변을 따라 쭉 내려와 안동댐을 지나 법흥교까지 와서 강을 건너는 코스였다.

그곳엔 안개가 자주 꼈다. 안동 시가지를 뒤덮은 안개는 여행객에겐 몽환적이고 신비롭게 비춰지는 듯했다. 실제로 그 모습은 무척 아름다웠다. 그 광경을 보면 하세가와 도하쿠(長谷川等伯)의 송림도(松林図) 병풍이 절로 생각났다. 병풍에 그려진 송림도는 안개에 싸인 소나무숲을 먹의 농담만으로 표현해 낸 그림으로, 그 안엔 소나무와 안개뿐만 아니라 바람도 있고 빛도 있다. 앞이 잘 보이지 않아 생기는 듯한 약간의 긴장감, 그래서인지 잠시 숨을 멈춰야 할 것 같은 고요함도 있다. 도시를 가로지르는 낙동강, 짙은 안개, 그 안개가 가리는 풍경에도 비슷한 고요함과 긴장감이 있었다.

하세가와 도하쿠의 송림도 병풍 / 출처: 도쿄국립미술관

그런데 안동 내에선 안개가 골칫거리이다. 안개는 일조량을 감소시키고, 농작물 냉해를 유발할 뿐만 아니라 도로에서는 시야 확보가 어려워 교통 사고 위험도 높아진다. 특히 안동은 수계 지역이 넓고 산악으로 둘러싸인 분지 지형이므로 전국에서 안개 발생 빈도가 가장 높고 지속 시간도 길다. 댐의 영향도 있다. 전력 생산, 홍수 조절, 용수 확보 등과 같은 댐의 역할은 널리 홍보되고 있지만 댐 건설에 따르는 부작용, 희생도 무시할 수 없다. 그곳의 살던 사람도, 동물도, 식물도 삶의 터전을 잃으니 말이다.

안동에는 안동댐, 임하댐이 있는데 그중 임하댐은 1992년에 준공되었다. 이 댐이 생기면서 안동의 3개면 41개 자연 부락과 475만여 평의 토지가 침수되었고, 1,459가구 7,866명의 수몰민이 발생했다. 임하댐 위쪽 동네로 가는 도로 옆에는 멋진 호수 풍경이 펼쳐져 있었는데, 호수 아래가 사람들이 살던 마을이었다는 말을 듣고는 기분이 묘했던 기억이 난다. 며칠 전 박용래 시인의 「물기 머금 풍경 1」을 읽고 그때의 기분이 다시 한번 되살아났다.

뭣하러 나왔을까
멍멍이
망초 비낀 논둑길
꼴베는 아이
뱁새
돌아갔는데
뭣하러 나왔을까
누굴 기다리는 것일까. 멀리 줄지어 스치는
물기 머금
國道의 불빛

박용래, <물기 머금 풍경 1>,『백지』 (1979 가을)

이 시에 등장하는 ‘물기 머금은’ 국도는 나에게 안동의 안개를 떠올리게 했다. 그리고 누굴 기다리는지 모르게 길가에 나와 있는 멍멍이는 호수가 되어버린 마을을, 그 땅을 기억하는 누군가와 같다고 생각했다. 눈에 보이진 않지만 한때 존재했던 무언가를 기다린 건 아니었을지 하고 상상해 본 것이다. 댐이 만드는 뿌연 안개처럼 그 기억이 갈수록 흐릿해질 거라 생각하니 왠지 쓸쓸했다. 뭍을 물로, 물을 뭍으로 만드는 인간의 대담함이 발현될 때마다 얼마나 많은 생명들이 스러지는지 생각하면 아득한 마음도 든다. (댐으로 인해 사라진 땅, 간척 사업으로 인해 사라진 갯벌을 생각해 보자.)

‘기후대응댐’이란 이름으로 전국 곳곳에 댐이 만들어질 거라 한다. 건설 후보지 9곳은 확정되었고, 주민 반대 등으로 3곳은 보류되었다. 보류된 곳 중 하나는 청양·부여 지천댐인데, 최근 그곳에 가서 댐 건설 시 침수될 것으로 예상되는 까치내 자연유원지를 방문했다. 물가에 내려가자마자 수달 똥이 보였다. 물가와 연결된 숲 쪽으로 가니 밤나무, 참나무 아래 여러 이끼, 고사리 등이 잎을 내밀고 있었다. 여기저기 고라니 발자국, 10종이 넘는 다양한 버섯, 수달 쉼터 등도 눈에 띄었다. 인기척에 놀란 옴개구리들은 팔짝 뛰어 물가로 피신하기 바빴다. 나중에 전해 들은 이야기로는 그 숲 뒤쪽으로 원시림이 펼쳐진다고 했다.

댐이 생기면 이 생명들은 모두 어찌될까?
아, 부디 그곳은 수달과 고라니와 옴개구리들이 편히 쉴 수 있는 곳으로 남기를!
안개가 흔한 곳이 되지 않기를!

  • 글 박지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