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 좋은 생각 품고
머물다가 
떠나가는 곳
  • 전시 <허윤희: 영원은 순간 속에>를 보고

몇 해 전 허윤희 작가님이 제주로 이주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그녀와 무척 어울린다 생각했다. 숲, 산과 주로 연결되는 인상을 주었던 그녀의 작품 세계가 바다와 연결된다면 어떤 모습일까 기대가 되었다. 허윤희 작가는 산책길에서 만난 나뭇잎 한 장을 그림으로 옮기고 그 아래 짧은 글을 남기는 <나뭇잎 일기> 작업을 무려 십여 년간 지속해왔다. 그녀의 작품을 보면 자연 속 존재의 찰나, 그 안에 담긴 고유성이 정성스럽고 소박하게 담겨 있어 나도 모르게 대상물에 정을 주게 된다. 《허윤희: 영원은 순간 속에》전시는 그런 그녀가 기록한 제주 바다를 서울에서 볼 기회였다.

전시가 열린 성북구립미술관 1층에 들어서자마자 제각기 다른 바다, 하늘 풍경을 담은 유화 그림 96점이 전시장의 세 벽을 꽉 채우고 있었다. 그러나 그 다른 풍경들은 모두 한 바다, 하늘이었다. 매일 다른 모습이었을 뿐.
허윤희 작가는 2023년 10월 16일부터 거의 매일 같은 장소에 나가 그곳의 바다와 하늘을 그렸다. 제주 이주 이후 날마다 일출을 보기 위해 바닷가로 나갔던 그녀는 우주가 보여주는 장엄한 순간에 감동하여 그 풍경을 캔버스에 담기로 결심했다. 끝없는 경쟁 속에서 외롭고 지쳤을 도시 사람들에게 자연의 생명력을 전해주고 싶었다고 한다.

누구나 예측할 수 있듯 자연에서의 그림 그리기는 녹록하지 않았다. 매서운 추위와 바람이 공기를 지배할 때면 이젤은 넘어지고 캔버스는 날아갔다. 한겨울엔 텐트를 치고 그 안에서 그림을 그려야 했지만, 허윤희 작가는 바람이 불면 바람이 잦아들기를 기다렸다가 한 획의 선을 그을 줄 아는 사람이었다. 자연의 예측 불가능성을 사랑한 그녀는 그것을 오롯이 받아들였다. 작가는 나중에 그림을 다시 보았을 때 아쉬운 점이 있더라도 그림을 고치지 않았다. 자연과 더불어 자연을 그렸으므로 그 순간의 생생함을 우선시한 것이다.

나는 바닷가에서 태어나 그런지 바다를 생각하면 왠지 그리운 마음이 든다. 바다 밖에서 바라본 바다를 그린 허윤희 작가의 <해돋이 연작>은 나의 그런 마음을 잘 대변해주는 것 같다. 그런데 가끔 땅에 발 딛고 있는 내게, 바다에 몸 담그고 있는 친구가 바닷속 이야기를 들려줄 때면 바닷속 세계에 대해 더 잘 알고 싶은 마음이 들기도 한다. 스쿠버 다이빙을 하는 내 친구는 지난달에 제주 바다에 들어갔다가 아름다운 미역숲을 봤다고 했다. 날씨가 더우면 모두 녹아버리므로 봄 바다에서만 볼 수 있는 풍경이라고 한다.

물론 바닷속 이야기가 아름답지만은 않다. 기후변화 때문에 미역이 많이 사라져 미역숲이 있는 제주 봄바다는 더이상 흔한 풍경이 아니다. 밍크고래 이야기도 너무 슬프고 끔찍하다. 얼마 전에(그 전부터 있었지만) 밍크고래를 불법 포획·해체해 항구로 운반하던 선박을 적발했다는 뉴스를 보았다. 우리나라는 고래 포획이 법적으로 금지되어 있으나, 동시에 비보호종 고래가 혼획된 경우 유통을 허용하고 있다. 밍크고래는 세계자연보전연맹(IUCN)에서는 멸종위기종으로 분류하고 있지만 우리나라에서는 해양보호생물종으로 지정되어 있지 않다. 고래 한 마리는 최대 수억의 가치에 달하므로 의도적 혼획, 불법 포획이 자행된다. 육지의 대형 포유류 포식자가 거의 사라진 이 나라에서 바다를 지키며 사는 대형 포유류 포식자에 대해서는 왜 이리 무심할까. 이해할 수 없다.

허윤희 작가님이 그린 제주 바다를 보며 그 품에 안겨 사는 무수한 생명을 떠올려 본다. 그러니 더욱 바다가 그립다. 밍크고래가 뛰노는 바다가, 미역숲이 있는 바다가 그립다.

  • [자연 한 조각] 글과 사진 박지연
  • 글쓴이가 직접 전시를 보고 찍은 사진들
  • <나뭇잎 일기> 연작 일부와 <해돋이 일기> 연작 일부, 전시장 풍경

스코트 니어링의 간소하고 질서 있는 생활을 배우자.

미리 계획을 세울 것. 일관성을 유지할 것. 꼭 필요하지 않은 일을 멀리 할 것. 되도록 마음이 흐트러지지 않을 것. 그날 그날 자연과 사람 사이의 가치있는 만남을 이루어 가고, 노동으로 생계를 세울 것. 자료를 모으고 체계를 세울 것. 연구에 온 힘을 쏟고 방향성을 지킬 것. 쓰고 강연하며 가르칠 것. 원초적이고 우주적인 힘에 대한 이해를 넓힐 것. 계속해서 배우고 익혀 점차 통일되고, 원만하며 균형잡힌 인격체를 완성할 것.

허윤희의 <나뭇잎 일기> 내용 (두 번째 사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