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문화거실의 이름을 두고 무슨 뜻이냐, 과일 체리인지 물어보는 분들이 가끔 계셨다. 최근에는 체리나무가 있던 자리의 한옥이냐고도 물어보셨다. 그래서 아예 전시를 열어 한 번 제대로 설명해야지 싶었다. 사실 체리를 연상해도 된다고 생각하며 이름을 지었는데 우리의 아담한 계동 한옥이 과일로 치면 귀여운 앵두같은 모습이기도 한 까닭이다. 체리암(滯離庵) 이름 이야기에 이름 탄생 배경에 대해 상세히 적어둔 바가 있으니 여기서는 전시의 시각적 구성과 그 주인공들, 그리고 재밌는 순간들을 추억하고자 사진으로 기록하고 팥의 개인적 감상을 소개한다. 이번 전시는 체리암을 아껴주는 재능 많은 친구들에게 팥이 특별히 의뢰해서 제작한 작품들을 선보였고 아울러 전시의 의미를 잘 새기는 시도 두 편 소개했다. 이에 맞춰 포스터를 다양하게 디자인해보는 재미까지 맛보았다.





- 자수작가 정창윤의 문자도와 까치
사실 정창윤 작가는 한글 서예도 잘 쓴다. 그래서 처음에는 <혼불> 소설의 체리암 관련 중요한 글귀를 써달라고 부탁하기 위해 만나 체리암의 벽지로 쓰다만 한지를 건네드렸다. 그런데 얘기를 해보니 문장이 많아질수록 멋지게 쓰기 오히려 어렵다고 했다. 차라리 늘 작가가 창작하고 싶었던 문자도 형식으로로 체리암 세 글자를 한글로 쓰고 그 위에 자수로 장식하고 싶다고 의견을 냈다. 영문 고딕체를 바탕으로 한글로 응용해서 써보겠다고. 우리 문화거실은 창작자가 만들고 싶다는 의견을 내면 무조건 우선시하기 때문에 당장 그러자고 했다. 우리 체리암이 영감이 된 작품을 받아보는 것이야말로 최고의 멋이 아닐까. 아울러 우리 로고에 나오는 까치를 한지로 만들어달라고 요청했다. 창윤씨는 생명다양성재단에서 의뢰하는 온갖 동물형태를 만들어내는 마술사같은 작가니까 익히 그 실력을 알고 있었다. 전시기간 중에 손님께 까치 위치를 옮겨달라 요청하니(날아다녀야 하니까) 재밌어 하며 자신있게 옮긴 분들은 아무래도 예술작가들이었고 조금 당황한 분들은 글쓰는 분들이었다.




자수의 의미: 체리암이 장수하기 바라는 마음에 거북이와 나비를 넣었고 그윽한 향의 연꽃처럼 품위를 갖도록 기원했고 동백꽃처럼 굳은 약속 지키길 바라고, 귀엽디 귀여운 익충인 무당벌레같은 친구들이 많이 오길 원한다는 것. 이들이 우리 체리지기들(구름+바위)과 함께 노니는 모양으로 정했다. 거북이 입에서 상서로운 기운이 뿜어져 나오고 있다. 이 귀한 문자도를 받아들고 참 행복했다. 표구는 나중에 낙인 후 하기로 했다. 낙인도 자수로 해주신다고 해서 기대하고 있다!
- 김희라의 인왕산을 닮은 구름바위 전시 포스터와 시 포스터
전시 포스터를 김희라 디자이너에게 의뢰할 때 전시의 기조를 잘 전달하는 <구름바위> 시를 읽고 구현해달라고 부탁했다. 몇 가지 시안을 주셨는데 아무래도 우표 모양의 가장자리 장식으로 인왕산 비슷하게 그린 흑백 시안이 고풍스럽게 품격이 있으면서도 레트로 감성이 귀여워 당첨되었다. 엽서로도 제작하기로 했다. 젊은 친구가 삶의 태도도 진지하고 미적 감각이 남다른데다가 아주 성실히 의뢰사항들을 해석해주어 진심으로 기뻤다. 나머지 포스터 시안 중에 마침 함정재의 <체리암> 시를 인쇄하기에 안성맞춤인 그림이 눈에 들어왔다. 차분한 저녁 시간을 바위에 앉은 새가 즐기는 파란 그림도 채택되었다. 희라씨가 함정재의 시가 “온돌처럼 포근하고 따스한 느낌이 드는 시”라고 평했다. 전시 시점인 6월초의 계절과는 조금 안 어울리지만 겨울에 우리 공간을 방문해 영감을 받고 그러한 포근함이 잘 묻어나게 써주신 시라서 당연히 우리 이름 전시의 주인공 중 하나로 초대했다. 희라씨가 포스터를 만들면서 직접 그린 원화도 전시하기로 해서 더욱 풍성해졌다.

눈 덮인 지붕이 보이는 방이었다
고장 난 라디오에서 스와니강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백색소음 잠에 들기 위해 켜두었다
녹은 눈 난간을 타고 레인 드럼 두드렸고
이마 위로 떨어지는 눈송이
차갑다 생각하면 고요히 흐르고 있었다
맑고 깊은 스와니강
머무르고 싶을 때 머무르고 떠나고 싶을 때고 언제든
고장 난 라디오를 켰다
넓은 강변이었다
철새와 텃새가 잠시 쉬어갔다
눈길 사이로 지나가는 기차
창가의 검푸른 셔츠 내 머리 위에서 하늘거렸고
지붕 위로 빗질하고 있었다
보이지 않는 사람들이 보이지 않는 빗자루를 들고
하얀 눈을 쓸어 담아
내 방 안에 가득 풀어 놓는 바람이었다
나는 벽과 등을 맞대고 누워 레인 드럼
잠든 골목을 두드리는 동안
잠시 평화로웠다
하얗게 젖은 새의 날갯짓
잘게 부서진 얼음 조각들
베개 속에 가득해
눈을 감은 동안 강변이었다
선물이었던 라디오
고장 난 라디오
고쳐야 할 이유는 가끔이면 흘러나오는
당신의 목소리였다 맑고 묽었다함정재, <체리암>
신기하게도 체리암과 강변의 모습이 연결되었다. 그것도 넓은 강변. 철새와 텃새가 함께 노닌다면 머물기 참 좋은 곳이라는 뜻일 터. 첫 행을 보면 그야말로 시인에게 체리암이 장소적으로 제공한 영감이었다. 겨울에 체리암을 방문한 젊은 시인이 눈 덮인 지붕 풍경을 보고 천천히 순간이동을 하여, 아마도 어떤 계절인지 모르는 몽환적인 공간을 향해 흘러간다. 지지직 거리는 소리를 시작으로 빗소리, 기적 소리, 눈을 쓸어담는 소리, 바람 소리를 통과해 도착했을 것이다. 고장난 사물도 체리암에서는 멀쩡한 느낌이 주어지는데 그 이유는 아마도 시간이 멎은 듯한 느낌이 시인에게 와닿지 않았을까 싶다. 흔히 우리 손님들이 한옥 바닥에 앉으면 편안하다고 하다가 결국 누워보고 싶어하는데, 시인은 오롯이 우리 공간의 힘에 몸을 스르르 맡긴 셈이다.
나는 벽과 등을 맞대고 누워 레인 드럼/ 잠든 골목을 두드리는 동안/ 잠시 평화로웠다/ 하얗게 젖은 새의 날갯짓/ 잘게 부서진 얼음 조각들/ 베개 속에 가득해
결국 듣고 싶은 ‘당신의 목소리’를 향해 포근한 잠 속에서 강물 흐르듯 도착한 곳.
마침 여름에 이 글을 쓰며 함시인 덕분에 겨울의 고요도 맛보게 되었다. 시의 힘이다. 더 신기한 것은 오늘에서야 이 시의 스와니강하고 체리치기들에게 중요한 강이 나오는 시가 이렇게 연결된다는 것을 차츰 깨닫게 되었다. (후반부에 다시 이어갈 내용)

- 박정인의 <구름바위> 시 포스터와 <혼불> 글귀 포스터, 그리고 오류의 해프닝
동그란씨 디자이너(박정인)께는 시와 글귀를 앉힐 바위를 그려달라고 했다. 이름전 관련 의뢰와 동시에, 전시의 대미를 장식할 ‘이음 음악회’의 포스터와 우리 필진들 캐릭터 작업까지 부탁했다. 우리 가족과 오래 인연을 맺은 작가님은 거의 친척같은 느낌이다. 부담스러운 친척 말고 명절때 제일 만나고 싶은 그런 친척아저씨. 이야기꾼 소질도 엄청나서 만날 때마다 항상 배꼽을 잡곤 했다. 이름 전시의 전시글에 해당하는 <구름바위> 시가 너무 무겁게 여겨지지 않게 매우 산뜻한 색감을 바탕으로 잡아주셨다. 바위가 우뚝 솟아있고 작은 한옥이 보일랑 말랑, 언제나 귀여운 요소를 넣어주시는 작가님! (팥의 이미지를 구름 캐릭터로 만드는 작업 중인데 곰-바위 위에 떠다니는 중.) 서체 고르는 것도 각 글에 맞게 애써 주셨다. 이 분의 작업을 보면 “귀여움과 진지함은 한 끗 차이”라는 생각이 든다.

체리암 이름 전시를 위해 의뢰한 시였는데 [ㅊㄹㅇ시선] 3월의 시로 올라간 사연이 재밌다. 원래 3월의 시를 써주기로 한 분이 잘못 이해하고 12월의 시를 써주셨다. 그야말로 제목부터 12월이라는 말이 들어갔으니 3월인 척을 할 수도 없고. 중간에 소개하며 도와준 함시인이 무지 당황했다. 마침 바로 이 전시를 위해 송그늘 시인(필명)에게 받아둔 <구름바위>가 준비되어 있던 바람에 3월말에 급하게 올라갔던 것이다.


우리와 작업 중에 동그란씨가 일본 여행 중이었는데 구글 번역이 자동으로 장난을 쳐서 팥이 보낸 이메일 중 <혼불>의 글귀가 자동으로 요상하게 바뀌어 알아보기 힘든 코드처럼 변했다. 옛날 스타일의 글이라고 한국어로 인식하지 못했다는 건지? 바위 암을 리눅스 암이라고 바꿔놓았다. 하여간 AI가 벌인 일 때문에 사람들끼리 오해하는 상황도 앞으로 비일비재할 듯해서 오히려 이 이상한 글귀도 함께 전시하기로 했다. 아래 왼쪽 사진에서 정선경 칠보공예 작가가 이 오류의 글귀를 읽고있다.


이름 전시가 시작되기 직전에 이루어진 대통령선거 사전투표를 무사히 잘 마친 체리지기들이 희망찬 미래를 꿈꾸며 기분좋게 을지로의 어느 식당으로 가던 길에 인스타그램으로만 얼굴을 알던 한복생활인 김사다함씨를 거리에서 마주쳐 인사하게 되었다. ‘그 양반’이라고 써있는 해학적인 명함과 함께 동심결(한마음으로 맺는다는 의미) 매듭을 건네주셨다. 짧은 길거리에서의 만남 중에도 그렇게 정을 나눠주는 분. 그 인연으로 체리암으로 초청했다.



마침 정작가도 김사다함의 팬이라며 우연히 같은 날 만날 수 있게 되었는데 두 분 다 자수에 대해 잘 아시는 공통점까지 있어 대화가 재밌었다. 위 오른쪽 사진은 만유포라고 이름붙인 한복을 설명하고 있다. 아마 만국 유람용 도포라고 하셨던 것 같다. 합성섬유라서 막 빨아서 입어도 된다고. 유교보이도 실용적으로 유연하게 살고 있으시단다. 대단하다!



대체로 손님과 매우 흥겨운 얘기를 나누고 즐거운 시간을 보낸다. 재밌는 말도 들었다. “빼앗고 싶은 한옥입니다!” 체리암에 대한 칭찬을 K-드라마 스타일로 하신 분. 그런데 가끔 체리암에 오시는 분 중에 불쑥 건넨 말이 ‘뇌구조가 많이 다르시구나’라고 생각하게 만드는 경우가 있다. 이번에도 그랬다. 갑자기 “왜 까치를 로고로 했냐, 까치는 못됐다!”라고 했는데 난 이런 말투야말로 정말 인간중심적인 사고방식의 후안무치한 표현이라는 것을 새삼 더 깨달았다. 각 동식물의 생존방식이 다를 뿐이지 어떻게 저렇게 말하지?! 그럼 상어는 무시무시한 이빨 때문에 세상에서 제일 못됐나? 사실 지구상에서 제일 못됀 존재는 당근 인간이지.
또 종종 듣는 말은 “평소에 이렇게 비워두시냐, 아깝다~”이다. 난 이런 문장일수록 하나하나 다 뜯어본다.
1>평소에: ‘늘, 자주’의 뜻으로 보인다.
2>이렇게: ‘한심하게’로 들린다.
3>비워두시냐: 실컷 전시를 준비해서 지킴이까지 하고 있는 사람에게 ‘비워뒀다’고 말하는 재치! 악의는 없어보였으나 악랄하다.
4>아깝다 = 에어비엔비하면 얼마를 버는데 이런 좋은 위치의 한옥을 멍청하게도 쓴다.
팥은 체리암을 통해 머물다가 떠나가는 중에 많은 것을 느끼고 있다. 내가 내 공간 쓰는데도 처음 보는 이에게 힐난에 가까운 간섭조의 말을 많이 듣는다. 이럴수록 더욱 <체리암, 그 이름에 대하여> 전시가 결국 내 자신에게 다짐하는 전시라는 것을 되뇐다. 문자도 앞에 걸쳐둔 쪽빛 천으로 장식한 이유는 사실 체리지기들이 함께 한 역사의 중요한 상징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작은 결혼식에 썼던 천이다. 안도현의 <강>의 싯구 “너에게 가려고/ 나는 강을 만들었다”를 걸어두고 이 푸른 모시 천 두루말이를 신랑신부가 서서히 풀면서 전진하면 하객들이 그 뒤를 따르며 “너에게 가려고 만드는” 강인 긴 천을 양쪽에서 들어주는 참여형 공연 형식이었다.
너에게 가려고
나는 강을 만들었다강은 물소리를 들려주었고
물소리는 흰 새떼를 날려보냈고
흰 새떼는 눈발을 몰고 왔고
눈발은 울음을 터뜨렸고울음은 강을 만들었다
너에게 가려고안도현, <강>
이렇게 구름과 바위는 이 강에 몸을 실었고, 강을 만들어준 ‘울음’이 곧 체리암이 아닐까 한다. 울음이라는 방 안에는 슬픔, 기쁨, 회한, 안도, 절실함, 해소, 그리고 알아차림, 이 모두 다 앉아있다. 체리암에서 다루는 주제나 이야기, 또는 생기는 일은 흔히 이런 감정이 차례 차례로 등장한다.(물론 기쁨이 90%) 이 시에서 ‘너’는 결혼식 때는 팥과 곰이 서로에게 지칭하는 것이었지만 이제는 체리암을 아껴주는 친구로 읽게 된다. 마침 너무나 잘 어울리게도 마지막 날 마지막 손님이 바로 그런 친구였다. 바쁜 중에도 (문닫기 일보직전에) 와줬다. 엄청 잘 웃(어주)는 친구. 진지하게 삶을 대하고 즐기고, 열린 사고를 하는 사람. 그리고 따뜻한 마음을 표현해주는 사람. 참 고맙다, 우리 거북이가 상서로운 기운으로 부른 사람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