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 시절에 10권짜리 책 <혼불>을 읽었다. 전주 출신 최명희 작가의 미완성 대하소설인데 구한말과 일제강점기를 배경으로 한다. 1980년에서 1996년 사이에 우리의 뿌리의식과 고유문화의 정수를 살리고자 작가가 혼신을 다해 17년간 이 대작을 집필하다가 암투병 후 만51세에 사망했다. 작가는 우리말을 다각도로 깊이있게 연구하여 소설 속 인물의 배경과 지위에 따라 실감나게 사투리 표현을 살렸고 민속학 연구자 수준으로 다양한 자료를 수집하고 연구한 덕택에 고유의 풍습과 옛 생활역사를 상세히 알 수 있다.(절의 사천왕 연구가 특히 상세해서 인상적이다.)
우리말과 문화에 대한 애정이 담긴 <혼불>에 등장하는 어느 바위 이름을 우리가 시작하는 문화거실의 이름으로 차용하기로 마음 먹었다. 우리는 바위 암(巖) 자 대신 암자 암(庵) 자로 대체했다. 암자는 ‘작은 초가’라는 뜻도 있다. 계동집이 아담하고 바위 위에 앉아있는 형국이라 체리암이라는 예쁜 바위 이름이 어울린다고 생각한다.
뜻을 같이 하는 자들과 계동 창밖 풍경을 즐기고 머물다가 홀연히 떠난다는 뜻을 담고 싶었다. 의미있는 순간들 외의 흔적은 남기지 않고 떠난다는 것은 곧 쓰레기도 되가져간다는 의미도 담고 있다. 체리암은 환경과 쓰레기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는 곳이므로.
문화거실 체리암이 영감을 받은 <혼불>에서 ‘체리암’ 바위가 등장하는 대목들을 소개한다.
제2권 제10장 <무심한 어미, 이제야 두어 자 적는다> 55-56쪽
“매안이 작별이 본대 길어서 아마 오늘 해 지기 전에 정거장까지 닿기는 어려우실 겝니다. 아예 천천히 이약 이약 하면서, 만나는 사람마다 별사(別辭)가 섭섭잖게 나누고 가시지요.”
기표가 농을 섞어 말했다. 그러나 아주 빈말도 아니었다.
“다 정 깊은 일이지요. 그래서 귀문(貴門)에 예부터 체리암(滯離巖)이 있지 않겠습니까?”
허담의 응대에 기표가 호오, 놀란다.
“체리암을 알고 계십니까?”
“아름다운 이름입니다.”
체리암은, 동구밖에서 한참 오리 바깥으로 나간 길목에, 큰 내[川]를 낀 갈림길 어귀를 지키고 있는 커다란 바위다.
매안 이씨 문중에 손님이 왔을 때, 헤어지기 몹시 서운하여 떠나는 길의 발걸음 동무를 하면서 따라 걷다가, 차마 떨치기 어려운 소맷자락을 아쉽게 서로 놓고
“자. 이제는 여기서 헤어지자.”
고 명표(銘標)를 해 놓은 이 바위의 글씨는 매안 이문(李門) 몇 대조 할아버님께서 몸소 쓰시어 음각한 것이라 하였는데.
머물 사람은 남고, 갈 사람은 떠나는 바위
이 은근하고 그윽한 바위까지 효원은 아직껏 한 번도 나가 본 일이 없으나, 대문간에 선 채로 흰 두루마기 자락이 펄럭, 펄럭, 걸음을 따라 나부끼는 아버지의 뒷모습을 보이지 않을 때까지 바라보았다.제9권 제2장 체리암(滯離巖) 53-55쪽
“글씨, 참 좋지요?”
체리암(滯離巖).
도환은 갈래 길목 모퉁이 수풀 쪽에 등을 기대고 선 우람 우뚝한 바위를 올려다본다. 키를 훨씬 넘는 바위다. 몸체도 사방 예닐곱 자는 실하게 두두룩하여 덕성스럽지만, 빛깔 또한 아주 탁하게 검거나 목마른 듯 희부연 것이 아니라 물기를 촉촉이 머금은 윤이 가무롬히 흐르고, 석질도 단단하여 퍼실퍼실한 기가 없이 차고 매끄러워 보인다.
예로부터도 매안방과 사동방 일대는 돌이 많고 바위가 좋기로 이름났지만, 그 중에서도 이 바위는 유난히 아취가 있어 눈길을 끌었다.
“장중하기 태산 같지만, 유정(有情)하기 명주 같은 바위예요. 잘 생겼습니다.”
“구름의 뿌리가 바위라 하던데요.”
“바위를 운근(雲根)이라고 하니까.”
천 근 같은 바위가 어떻게 그 뭉침을 풀면 저 하늘의 구름이 되고, 형체도 정처도 없이 가벼운 저 구름이 어떻게 마음 내리면 이 무거운 지상의 바위가 되랴.
그 바위 앞 면, 검은 공단처럼 부드러운 가슴에 또렷또렷 글씨가 새겨져 있다.
체리암.머물고, 떠나는 바위라.
그 음각의 달필은 전아하면서도 호방하다.
글자에서 나즉한 숨결이 느껴진다.
마음이 스며 있는 글씨여서 그러하리라.
머무를 체(滯), 떠날 리(離), 바위 암(巖).(중략)
매안에 온 손님을 배웅할 때, 아니면 한양같이 먼 길 떠나는 가족을 보내며, 작별이 어려워 한 걸음 또 한 걸음, 들어가시라, 안녕히 가시라, 권하면서도 차마 헤어지지 못한 채 오 리 길을 소맷자락 부여잡는 마음으로 함께 따르다가, 이만큼 와서는 어쩔 수 없이 여정(餘情)을 아무리며 아쉽게 손 놓는 자리. 그곳이 바로 체리암이었다.
(중략)
이 한갓진 물가의 외따른 길모퉁이, 그대로 더 나아가면 서울로 가는 소롯길 하나 휘엇하게 벋은 언덕 아래, 이만큼에서 이제 그만 작별하자, 섭섭한 마음을 여미며 헤어지는 자리를 정하고, 그 바위에
‘滯離巖’
이라고 새겨 넣는 저 문자향(文字香)의 은근 지극함이라니.
*우리 공간에 오신 손님들 중에 과일 ‘체리’ 아닌지 또는 한옥 목재가 체리목이냐고 묻는 분들도 많은데 과일 체리를 떠올려도 무방하다고 생각한다. 우리 작은 계동집이 주는 빛나는 깜찍한 이미지랑 어울리므로. 한옥 목재가 체리목은 아니지만 이런 질문 받는 것 자체가 재밌다.
*참고로 오탁번 시인의 시 <詩人>에는 최명희 작가가 등장하는 대목이 있다.
‘杏子板(행자판) 검자주 옻칠 소반에 정갈한 백자 지접 흰 달 같이 놓이고, 다른 반찬 소용없어 간장 한 종지 앙징맞게 동무하여 따라온 것이, 벌써 마른 속에 입맛 돌게 하는데, 간장 한 점 숟가락 끝에 찍어 흰죽 위에 떨구고 한 술 뜨면’
「魂불」에 나오는 흰죽 먹는 장면이라네
말 하나하나 고르며 밤을 밝힌 최명희는
시 짓는답시고 죽을 쑤는 시인보다
정말 진짜 시인이었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