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 좋은 생각 품고
머물다가 
떠나가는 곳

낭독을 하는 날 체리암에 처음으로 방문한 김시인은 일찍 도착했다. 과일꾸러미를 들고 옴. 간식용은 아니었고 <top note>라는 시가 낭독 목록에 있는데 “볕이 잘 들지 않는 바닥에/ 유자, 라임, 레몬,/ 오렌지, 자몽, 귤을 쏟고서 주저앉아”라는 싯구가 등장한다. 볕이 잘 드는 테이블 위에 시트러스 계열의 파과(라고 했지만 내 눈엔 멀쩡해 보인)를 조심스레 올려두었고. 시인은 우리 툇마루에서 낭독회 손님들 기다리며, 행사 준비하는 체리지기들의 대화를 배경으로 작은 하늘조각과 마당 그리고 자갈들 틈을 타 올라온 이름모를 풀을 감상했다.

첫 시집 <잠든 사람과의 통화>(창비시선 509)의 첫 낭독회를 먼저 우리 공간에 대한 평으로 시작. 특히 체리암으로 올라오는 길과 한옥 내부에 대해. 저녁 7시반 코발트색 하늘에 반한 나시인. 체리암 두 번째 방문인데 또 길을 잃고 헤맸으나 그것도 재밌었다는 장시인. 편안한 공간. 생활의 공간이라는 평. 김시인이 <대기실>부터 낭독.

대기실

들러리라는 말
나는 왜 그 말이 외국에서 왔다고 생각했을까

멀리서 온 줄 알았는데
여기에 줄곧 있던 것들

그런 것들은 세월과 실수에 의해 발견되지

주인공은 정전기를 일으킨다

마찰은 주인공의 숙명이라는 지문에 따라
풍선을 머리카락에 갖다 대는 들러리

(시 일부 발췌)

이 시를 들으며 나는 외국에서 왔다고 온 말이라고 생각한 건 뭘까 떠올려보니, 조지훈의 <승무>에 나오는 “얇은 사 하이야 고깔은/ 고이 접어 나빌레라”의 나빌레라. ㄹ이 세 번 쓰인 것과 첫 ㄹ이 받침 + 나머지 ㄹ이 둘 다 초성인 점이 ‘들러리’와 공통적이네. (그리고 난 흔히 경상도말 들으면 격정적인 이탈리어를 듣는 느낌.)

“세월과 실수에 의해 발견”, “하루는 되는 게 아니라 보내는 거지” 이런 세밀한 관찰과 관점이 특히 마음에 든다. 실수 또는 벌어지지 않았으면 하는 일들로 인해 새로 피어나는 꽃이 많음을 요즘 특히 절실히 느낀다. “혼자 있는 공간에서 입을 크게 벌리고/ 공간이 될 것처럼” 이 세상에 일어난 그리고 일어날 일들에 대해 마음을 내려놓고 연 채, 준비하며 기다리는 상상을 해본다. “느끼고 말하는 것의 의미를 조금은 알 것 같다”는 김시인은 사실 많이 알고 있는 분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또는 많이 알게 될 분.

돌아가면서 <연면적> 다섯 편(p.15-28)을 연달아 읽었다. 시인 옆에 앉은 손님이 e-book으로 화면에 줄바꾸기가 나온 대로 읽다가 “같아_____요” 라고, ‘요’가 귀엽게 한참 있다 따라나와 다 웃음. 일상소재: 커튼, 천, 보플, 부스러기가 자주 소재로 등장한다고. 바닥 면적의 총합이 연면적, 즉 마음의 너비로 보게 된 김시인. 원래는 공간감, 공간의 여유를 느끼게 하는 단어로 시집 제목을 ‘헤드룸’이라고 정하고 싶었다. 제일 나중에 쓴 시였다. 세 번째 <연면적>에 등장하는 “환한 햇살 속에서 춤추는 먼지”에 대해 곰은 평소에 자신이 먼지에 대해 느끼는 것을 잘 표현해주었다고 반가워했다. 나는 날벌레의 더듬이까지 생각해보는 김시인의 마음을 고이 간직하고 싶었다. 그럴 때마다 김시인의 시집을 열어봐야지.

연면적

복층집에 대한 로망
있었죠

무릎 생각해서 단층집에 사는 건 아니지만
이 안에서 좋은 점을 찾아야죠

그래도 여전히 층고가 높으면 좋아 보이긴 해요
먼지도 좋아하겠죠

환한 햇살 속에서 춤추는 먼지
사실 먼지는 그렇게 계속 춤춰왔는데
제 눈엔 한동안 가라앉은 먼지만 보였거든요

제 박수 소리에 놀라
바삐 도망치다 죽은 날벌레들

빛에 달려든 날벌레에게
무슨 죄가 있겠어요

인간은요
태양보다 약하면서 가까이 있는 등(燈)처럼 굴어
그게 문제일 때가 있대요

인간에게 달려드는 일에
무슨 죄가 있을까 생각해보셨나요

불 꺼진 방을 기어다니는
어떤 벌레에는 더듬이가 곧 날개일지 모르는데
그만큼 귀한 걸 찾아보세요

날개만으로 피할 길이 없을 땐
우글거리는 사랑을 하는 거예요

시인이 Siri에게 대신 시를 읽어달라고 했던 경험을 얘기했다. 또 Chatgpt에게 김민지의 시집 <잠든 사람과의 통화>를 소개해보라 하니까 “아주 잘 잡히는 안테나같은 시집”이란다. 잠든 사람과도 통화가 가능한 시인 김민지. 반찬통 소리에도 가슴이 철렁하는 사람이라고 했단다. <0의 분포>는 원래 낭독용으로 쓴 것이 아니라서 Siri의 여러 목소리 이용하고, 말하기 속도를 조절해 봄. 김시인이 조절을 해두어 그런지 그런대로 낭독하는 맛으로 읽어주기도 했으나 읽기 난처한 것 피하는 게 웃겼다. (싯구 중에 나오는 “VLOOKUP 함수”가 뭐냐고 곰에게 나중에 물으니 Excel spreadsheet에서 특정value를 찾아 그 value에 내가 지정하는 값을 assign하라고 하는 것이라며 곰이 학생들 성적처리할 때 자주 쓴다고.) 후반부 싯구는 엑셀 오류 코드. 하여간 이 시에서 마지막 행에 “오류 무시(I)”라는 것이 의미심장하다.

그 다음은 사람의 낭독과 Siri의 낭독을 비교하자며 <웃옷>을 읽었다. ‘웃옷’이라는 단어가 연속으로 반복되는 연이 있는데 마치 사람들이 나란히 서있는 모습으로 5행이 모여있는 모습이 학교운동장에서 조회할 때 모습같다. 테이블에 둘러앉은 낭독 손님들이 정신집중하여 놀림노래처럼 웃옷을 각자가 끊어서 읽어봄. 목소리와 톤과 길이와 성량이 웃옷마다 다르니 매우 흥미로운 낭독이었다. 사람들은 “우돋-우돋-우돋…” 이렇게 발음했는데 Siri보고 읽어보라 하니 “우돗수돗수돗….”을 엄청 빨리 이어갔다. 아마도 이 차이는 영원하리.

이제 다른 행성에 살기. Terraforming. 어느 행성을 지구처럼 그 환경을 바꾸어 생명체가 가서 살 수 있도록 하기라는 뜻이라는데.

테라포밍

너는 숨 한번에 어떤 생각을 얼마나
흘려보낼 수 있는 사람일까

모든 우연이 겹쳤다

우연이겠지
의식하는 순간 운명이 멈춰

이제 잘 모르겠는 사랑을 하려고
수소문 끝에 찾은 굴절들

망울, 몽우리, 봉오리
꽃이라는 말을 달지 않아도
발음한 모든 게 열릴 듯한 이맘때

흐드러지게 벌어진 고백 후
결과적으로 살았다는 이야기를 나눈다

매일 조금씩 닳아가는 물건과 안도감

마음이 또다른 태양계
유일한 고리 행성처럼 움직인다

김시인은 테라포밍은 바닥과의 마찰 같다면. 전체-천체-전제는 둘러싼 공기라고 설명했다. <너의 전제는 이렇다>, <너의 전체는 이렇다>, <너의 천체는 이렇다>는 연속해서 썼고 연작시에 가까운 시들이라고. “전제는 나만의 기준, 전체는 그것의 결과값, 천체는 내가 계산할 수 없다는 것”이라는 설명을 들으니 시어 선택과 제목 설정의 달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시인은 카피라이터로 직장생활을 하고있다!)

이 연작에 등장하는 이응에 대해: 웅크려서 말하기 즉 “그만해를 자기 식으로 둥글려 말하기”: 다정한 말투의 사람을 생각해서 묘사해봄. 각자 성향대로 구어체에 영향이 있다. 시인의 동생은 “사랑스러운 구어체”(<너의 전제는 이렇다>)를 구사하는 ‘입말이 다정한 사람’이라고. 시인은 무심한 말투인 데 반해. <너의 전체는 이렇다>에서 도미노가 쓰러지는 이미지 떠올렸다고. “중간에 쓰러져/ 쓰러뜨린 많은 것들” 키보드 누르는 느낌과 마모된 바퀴를 떠올림. 그래서 또 “이응 자리가 유독 닳아 있다”로 끝난다. 결국 김시인은 자신의 시에 곡선이 많다고 밝혔다. “직선으로 뻗지 않고/ 허공을 하산하는 중력”(<너의 천체는 이렇다>)

아까 e-book보며 낭독하다가 우릴 웃게 한 분이 ‘전애인에 대한 그리움’이 아닐까하며 ‘잠든 사람과의 통화’ 시집의 시 전반을 읽었다고 했다. 물론 연애할 때 잠들 때까지 전화기를 놓지 않는 순간을 생각할 수도 있지만 시인은 꼭 그런 건 아니다라고 대답했다. 아마도 일관된 감성은 오히려 “어둠/빛. 울음과 하얀 물질.” 사실 <밀양> 덕분에 이 시집이 나왔다고. (밝은 빛의 시를 몇 편 쓰지 않았다.) 밀양 만어사에서 있었던 일을 시인이 얘기했다. “유래는 다 두드리고 찾자/ 소원도 마찬가지” 그 절의 소원돌을 두드리면 쇠소리가 난다는데 소원의 무게가 핵심이다. “소원 들어주는 돌은/ 들리지 않아야 한다” 그 돌(무게)이 번쩍 안 들려야 소원이 이루어지는데 시인은 그걸 모르고 애써 들어버린 웃픈 사연. 이 시의 배경이야기를 듣지 않고 감상하게 되면 오히려 ‘귀로’ 들리지 않아야 한다고도 해석할 수 있어 흥미롭다. 어쨋든 이 시 덕분에 밀양에서 꼭 가볼 목적지가 생겼다. 물론 이 시집을 들고 가야지! <인부의 말> 마지막 싯구에서 시집의 제목을 따오게 됨. 죽음, 고용 불안, 그로테스크함, 잠잠, 더욱 기묘함에 대하여 생각해본 시인.

낭독 목록에는 빠져있으나 <꿈의 꿈치들>을 개인적으로 아주 재밌게 읽었다. 처음 김시인 만난 날도 이 시에 대해 물어보니 어느 문학상 최종심까지 들었던 시라고.

꿈의 꿈치들

그날 밥상에서 아무도 건드리지 않던 밑반찬, 바위보다 많은 파도를 만난 방파제, 수증기를 달고 사는 욕실 거울, 숨어서 알을 까는 곤충들의 더듬이, 점선을 따라가다 부러뜨린 칼날, 설마와 혹시의 우정, 다른 사람 집에 흘리고 온 머리카락, 힘이 들어간 구두 속 발가락, 공기를 밟고 올라서다 넘어지는 취객의 목소리, 언덕 위의 반지하, 평일 은행원의 시재

진은영의 ‘나는’ 처럼 나에 대한 은유일 수 있다고. 어떤 사람들은 놀랍도록 팔꿈치가 하얗다, 마치 아무 고생도 안한 모습이 이상했다. 닳지 않는, 타고난, 애써 꾸리는/꾸미는 것이 아닌 모습을 담아봤다고. 평일 은행원의 時在란 돈을 맞추는 것. 수지타산을 생각하는 사람. 그들에게는 분주하고 당황스러운 시간이라는 생각을 해보았다고.

너무 삶은 시금치, 빨다 버린 막대사탕, 나는 촌충으로 둘둘 말릴 집, 부서진 가위, 가짜 석유를 파는 주유소, 도마 위에 흩어진 생선비늘, 계속 회전하는 나침판, 나는 썩은 과일 도둑, 오래도록 오지 않는 잠, 밀가루 포대 속에 집어넣은 젖은 손, 외다리 남자의 부러진 목발, 노란 풍선 꼭지, 어느 입술이 닿던 날 너무 부풀어올랐다 찢어진

진은영, <나는>

(차례 전 페이지에 실린) 시인의 말을 보면

따라 오릴 수 있는 점선과
비뚤거리는 목소리로
순면 같은 시절을

따라가는 점선이 <꿈의 꿈치들>에 또 등장한다. 김시인은 삶의 모든 게 시늉같다고 느낀단다. 이미 올은 나갔다고. 사회적 참사들이 규명되지 않고. 설명할 수 없는 일들이 탕!탕!탕! 터질 때 오히려 사는 느낌이 든다고. 평소에는 변수를 전혀 안 두려는 습관이 있는 너무 착실한 자신. <가만 나만 다만>에서 “흙으로 가득 채운 공간에/ 자갈을 찔러 넣는 방식으로/ 살아가는 사람도 있다”며 김시인은 언제나 상비약을 사놓고 아플 때를 준비하는 삶이라고.

모든 것에 맞출 준비를 하면 어긋났다
같은 앵글 다른 구도에서도 감정은 연결하고 가자

<대기실>에서 발췌

사진 김민지

낭독회를 마치고 차 또는 약주를 한 잔씩 걸치고 나서 독자의 질문 하나는 언제나 글쓰기로 돌아오는 생활이냐? 이에, 쓰는 리듬을 유지하기 위해 돌아오려는 책임감은 있다는 대답을 했다. 계속 돌아오시죠 김시인! 올해 하반기에는 산문 낭독회를 열기 위해 체리암에 오긴 오실 테니. 시인이 참가자들에게 한아조 비누를 하나씩 깜짝선물로 주면서 포장 종이도 제공하는 세심함을 발휘.(체리지기들이 환경사랑을 주요 테마로 이곳을 운영한다는 것을 알기에!) 손님 중에 누군가 ‘하나(만) 줘’ 비누라고 들었다고 해서 또 한 차례 여럿이 웃었다. 우리는 손님들께 체리암 편지봉투와 편지지 세트 제작 기념으로 드렸다. 다들 비누와 종이를 받아들고 함박웃음으로 마무리 + 김시인은 우리 편지지에 시를 쓰겠다고 하니 더할 나위 없이 기뻤다. (이날 손님들이 대부분이 시인들이니 다들 그렇게 하시면 좋겠다!)

사진 김민지

팥은 이 글의 마무리로 김민지의 <꿈의 꿈치들>을 받아서 <현실의 꿈치들>로 변형하여 재미로 써볼까 한다.

그날 밥상에서 다 먹지도 않을 거면서 건드린 샐러드, 바위보다 많은 파도를 만난 체리암, 호르몬의 불균형으로 깨뜨린 거울 액자, 숨어서 흠집을 숨기려한 바보들의 행진, 점선을 따라가다 대답도 못한 인터뷰, 설마와 ‘루이즈의 짜증’, 행사 후 흘리고 간 휘어진 긴 머리카락, 힘 빠지는 일들로 휘는 척추, 공기를 밟고 올라서다 웃어 자빠지는 나, 언덕 위 귀여운 곰바위, 무료모임의 나날들

팥.

*만어사 소원돌 관련 블로그 글 참조
https://blog.naver.com/heettuhattu/22369466527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