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 좋은 생각 품고
머물다가 
떠나가는 곳

1
이 글은 출발이 아닌 도착으로부터 시작된다. 출발하지 않고서는 어떤 곳으로도 도착하지 못하듯, 시작하지 않고서는 무엇도 써낼 수 없으니까. 그러니 내게서 출발한 말들 역시 어딘가에 도착하고 나서야 소리를 가질 수 있을 것이다. 모든 일을 끝마치고서야 알게 되는 뻗어 나가는 힘. 강한 힘을 낼수록 지나간 곳의 자국은 분명하게 남는다. 나 혼자서만 기억하게 되더라도, 내가 있었다는 것을 스스로 남겨둘 수 있다는 일은 어떤 것으로도 대체할 수 없는 행위여서 해변을 지나치지 못한다. 발자국, 파도에 쓸려 금세 지워지더라도, 발자국을 남길 때의 분명한 감각은 내게 오래도록 남아 있을 것이다.

구월이 시작되고서 가장 먼저 한 것은
속초행 버스에서 내려 바다 내음을 맡는 일이었다.

2
무거운 짐과 내리는 비 때문에 걸어서 15분이면 갈 거리이지만 택시를 탔다. 택시기사님은 퉁명스러운 말투로 “속초 사람들은 걸어서 가는 거리인데…” 말했고 우리는 멋쩍은 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렇게 택시에서 내려 들어선 시장은 관광객들로 북적이고 있었다. 북적이는 사람들 속에서 우리의 존재감은 작은 소음 정도로 치부되는 것이 좋았다. 홍게 라면과 감자전과 막걸리 한 병, 모자라지도 더하지도 않은 맛. 그러나 어디에 누구와 있는지에 따라 맛이라는 건 천차만별이니까. 괜히 더 맛있다고 말해보았다. 먹고 나와서는 시장 주변에 있는 소품 가게를 몇 군데 돌아보았고, 유명하다는 식당에서 꽈배기도 하나 사 먹었다. 보슬보슬 내리는 비가 아니었다면 더 맑은 걸음으로 시장을 둘러볼 수 있었을까? 날이 맑았다면 햇빛 때문에 더워서 되려 힘들었을 거야, 그렇네, 우리는 말을 주고받으며 꽈배기를 서로의 입에 물려주었다.

3
숙소에 도착해 짐을 풀었다. 커튼을 젖히면 바로 바다가 펼쳐졌다. 왜 숙소 이름이 <바다소리펜션>인지 단번에 짐작할 수 있었다. 비도 조금씩 자취를 감추기 시작해서 카페에 가기 위해 걸었다. 왼편에는 마을, 오른편에는 바다가 우리의 고개를 이리저리 돌아가게 만들었고, 지금은 폐가가 된 작업장들이 여럿 있었다. 예전에는 바다에 나갔다가 이곳에 둘러앉아 작업하고 이야기를 나누었겠지. 이곳을 처음 마주했지만, 상상만으로도 예전 사람들의 모습을 떠올려볼 수 있는 것은 역시 장소 덕분일까. 이제는 아무도 없는 곳에 아무를 불러오는 일. 이제는 없지만 없어지지는 않는 일. 숨을 쉴 때마다 짠내가 올라왔다.

다녀간 사람이 많다고 해서 다 좋은 장소는 아닌가 봐, 우리는 마주 앉아 서로의 사진을 찍어주었다. 처음 온 속초에서 처음 남기는 나의 모습, 사진 찍히는 것을 좋아하지 않지만 그때만큼은 가만히 있었다. 결국 남은 사진은 카메라를 들고 당신을 찍는 모습뿐이었지만. 그 안에 담긴 카페와 지나가는 사람과 등등의 것들을 오래 바라보았다. 의도치 않게 남겨진 것들에게 할애하는 시간을 요즘에는 의도적으로 늘리고 있기 때문이다.

4
이튿날에는 택시를 타고 양양으로 향했다. 당신이 어릴 적에 갔다던 낙산사에 가기 위함이었다. 딱 한 가지의 소원만 빌 수 있다는 그곳에서 우리가 어떤 소원을 빌게 될 지 궁금하기도 했다. 가는 길에는 <흥부네 밥상>이라는 식당에서 점심을 먹었다. 30분 가량을 기다리고 먹었는데도 맛이 좋았다. 우리를 제외하고는 다들 연령대가 있어서 “제대로 찾았구나!” 소곤거렸다.
낙산사에 도착해서는 서로에게 선물을 한 가지씩 사주었다. 나는 붉은 열매로 만들어진 목걸이를, 당신은 호랑이가 들어선 염주를 사서 주고받았다.
비는 급작스럽게 쏟아지기 시작했다.
소원을 빌기 위한 곳에 도착하자 불경 소리가 울려 퍼지고 있었다. 나는 왼쪽 어깨가, 당신은 오른쪽 어깨가 젖어 누가 보아도 우리가 한 우산을 쓰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돌상을 쓰다듬고, 쓰다듬은 손을 모아 눈을 감는다. 소원을 빌고 우리는 그곳을 빠져나왔다. 낙산사의 가장 높은 곳에 있는 불상에서도 당신은 소원을 빌었다. 나는 그 뒷모습을 남겨두었는데, 손을 모아 무언가를 비는 사람의 뒷모습은 이토록 단단해 보이는구나 싶었다.
돌탑이 늘어진 길을 걸었다.
산세가 짙은 흙길도 걸었다.

무슨 소원을 빌었어?
비밀이야.

5
해변에 앉아 파도를 맞고 있었다. 이쪽 끝에서 저쪽 끝으로 걸으며 다음날이면 지워질 발자국을 남기기도 했다. 돌아가는 대관람차 아래서 사진을 찍으며 이 순간은 기억 속에서 오랫동안 떠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동네를 둘러보다가 허름한 고깃집에 들어가 저녁을 먹었는데, 막 찾아간 곳에서 뜻밖의 맛을 접하고는 술을 연신 들이켰다. 다른 테이블에서는 사장님과 지인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웃고 떠들며 밥을 먹고 있었다. 속초에서 이곳은 오래되었겠지. 그렇지만 우리에게는 낯설고 생소한 곳. 가끔 이 간극이 좁혀지지 않아 장소에 관한 이질감이 생긴다. 그 이질감이 여행지에 있다는 느낌을 증폭시키는 것이 아닐까? 발을 붙이고 있는 곳에서 느끼는 분리된 감각이 나쁘지만은 않다.
밤에는 숙소 앞에 나가서 불꽃놀이를 했다. 불꽃이 반짝일 때마다 환해지는 얼굴을 보며 우리의 표정에 숨어드는 것이 어둠이 아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6
마지막 날에는 갯배를 타고 아바이마을로 향했다. 아바이마을에서의 기억은 온통 더해지는 기억뿐이다. 카페에서는 아무렇지도 않게 음료를 추가로 가득 주었고, 식당에서는 손이 크다며 거의 1.5배 정도의 음식을 내주었다. 결국 음료도 음식도 남길 수밖에 없었다. 이런 식으로 무언가를 남기고 싶었던 것은 아닌데, 그래도 웃으며 잘 가라고 말해주는 사람들의 목소리는 기억은 선명히 남았다.
돌아오는 버스에서는 차창 밖을 바라보며 이런저런 생각을 했는데 모두 잊어버렸다. 그리고 그것이 아무렇지도 않다. 잊어도 되는 기억이란 무엇일까. 아무렇지도 않은 예전이란 또 무엇이고. 나는 잘 모르겠다. 아무것도 잊고 싶지가 않은데, 돌아보면 이미 많은 것들이 사라진 채 황량하다. 그런 생각이 들 때마다 손을 꽉 쥐었다. 꽉 쥔 손안의 어둠은 내가 언제든 가질 수 있는 힘이니까. 어둠을 슬픔으로 해석하지 마. 어둠 속에서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생각해.

그렇게 서울로 돌아왔다.

7
속초에서
-최영미

바다, 일렁거림이 파도라고 배운 일곱 살이 있었다

과거의 풍경들이 솟아올라 하나 둘 섬을 만든다. 드문드문 건져올린 기억으로 가까운 모래밭을 두어번 공격하다보면 어느새 날 저물어, 소문대로 갈매기는 공없이 어깨춤을 추었다. 지루한 비행飛行 끝에 젖은 자리가 마를 만하면 다시 일어나 하얀 거품 쏟으며 그는 떠났다. 기다릴 듯 그 밑에 몸져누운 이마여―자고 나면 한 부대씩 구름 몰려오고 귀밑털에 걸린 마지막 파도 소리는 꼭 폭탄 터지는 듯 크게 울렸다.

바다, 밀면서 밀리는 게 파도라고 배운 서른두 살이 있었다

더 이상 무너질 것도 없는데 비가 내리고, 어디 누우나 비 오는 밤이면 커튼처럼 끌리는 비린내, 비릿한 한움큼조차 쫓아내지 못한 세월을 차례로 무너뜨리며 밤이 깊어가고 처벅처벅 해안선 따라 낯익은 이름들이 빠진다. 빨랫줄에 널린 오징어처럼 축 늘어진 치욕, 아무리 곱씹어도 이제는 고스란히 떠오르지도 못하는 세월인데, 산 오징어의 단추 같은 눈으로 횟집 수족관을 보면 아, 어느새 환하게 불 켜고 꼬리 흔들며 달려드는 죽음이여― 네가 내게 기울기 전에 내가 먼저 네게로 기울어가리.

  • 글과 사진 장대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