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 좋은 생각 품고
머물다가 
떠나가는 곳

체리암이 전시를 여는 경로는 다양해서, 팥이 지나가다가 어느 전시를 보고 작가를 마침 만나게 되어 성사되는 경우들도 꽤 있다. 작년에 서촌에 위치한 서간에서 프랑스 작가 Laury Denoyes(로희 드노예)가 그림 전시를 하고 있을 때 만나 반가운 대화가 이어졌고 곧 체리암에서 열 전시의 기획을 함께 했다. 기획에 앞서 로희의 한국과 아시아에 대한 사랑, 그리고 그에게 중국인의 피가 흐른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작가는 증조부의 사진 몇 장을 보여줬는데 흑백영화 속 주인공 같은 면모였다. 사람이 뿌리는 못 속이니, 분명 로희의 그림들은 매우 동양적인 미가 다분했다. 특히 체리암이 관심을 가진 것은 식물성 염료를 직접 만들어 작업한다는 점이었다. 그리고 로희의 뿌리에 대해.

프랑스에 정착한 중국 이민자들(중간에 수앙)

수앙(Souang)씨는 1908년 중국 동부 해안 저장성의 항구 도시 원저우(Wenzhou) 인근에서 태어났으며, 젊은 시절에는 양복 재단사로 일했다. 수앙이라는 발음은 그의 성 ‘孙’을 프랑스어 발음으로 표기한 것이다. 1930년대 중국은 극심한 폭력적인 분쟁으로 혼란에 빠져 있었다. 장제스가 이끄는 국민당 세력과 마오쩌둥의 공산당 세력이 내전을 벌이는 한편, 1931년 이미 만주를 장악했던 일본 제국은 중국 영토에 대한 지배력을 공격적으로 확대하고 있었다. 수앙 씨는 국민당원이었기에 공산당의 잠재적 표적이 되었다.

1936년 무렵, 그는 사촌과 친구 몇 명과 함께 중국을 떠나 유럽으로 가기로 결심했다. 그들은 홍콩 인근의 주요 항구인 광저우로 이동하여 화물선 선원으로 일하게 되었는데, 이는 당시 원저우 지역 출신들이 흔히 이용하던 경로였다. 원저우항은 1876년 국제 무역을 위해 개항한 이래 오랜 이민의 역사를 지니고 있었다. 특히 인근 칭톈(Qingtian)현 출신을 포함한 중국인 노동자들이 제1차 세계대전 이후 프랑스로 건너가 정착한 뒤 가족 인맥을 통해 수십 년간 이주가 계속 이어져 왔다.

수앙씨와 친구들은 1937년 12월 난징 대학살*이 발생하기 불과 1년 전에 중국을 떠났는데, 당시 일본 제국군은 불과 몇 주 만에 10만에서 30만 명에 이르는 민간인과 전쟁 포로를 학살했다. 그 후 몇 년 동안 저장성 해안 전역이 일본군의 군사 작전 영향권에 놓였으며, 수앙씨의 가족은 그 위협 속에서 살아가야 했다.
*난징 대학살(Nanjing Massacre)이란 중일 전쟁 때 중화민국의 수도인 난징을 점령한 일본 제국이 군대를 동원해 중국인을 무차별 강간하고 학살한 사건이다.

수잔느와 수앙

이민자 친구들 중 일부는 네덜란드에, 다른 이들은 프랑스로 건너가 파리 인근 비양쿠르에 있는 르노(Renault) 자동차 공장에서 일자리를 얻었다. 그 후 수앙 씨는 브르타뉴 지방의 생브리외(Saint-Brieuc)에 정착했다. 당시 대부분의 이민자들처럼, 수앙 씨는 프랑스 여성과 결혼하여 새로운 일을 시작했다. 루이즈를 만나 1937년에 결혼했으며 가죽 소품 제작을 전문으로 작업했다. 이혼을 하게 된 후 수앙 씨는 재혼하여 1942년 수잔느와 결혼하여 슬하에 아들과 딸을 낳았는데 그 딸이 로희의 외할머니인 도미니끄이다.

먼 거리와 수십 년의 세월 탓도 있었지만, 수앙 씨와 그의 가족은 다시는 중국 땅을 밟지 못했다. 그곳에 여전히 친척들이 남아 있었지만 그들은 돌아가지 않았다. 내전과 공산주의 체제의 공포, 그리고 일본의 침략으로 인한 잔혹 행위는 그들에게 깊은 트라우마를 남겼고, 대다수는 자신의 이야기를 침묵 속에 묻어두었다. 그들은 고향에 남은 이들을 도와주기 위해, 공산 정권의 검열을 피할 수 있도록 연필이나 일상용품 속에 돈을 숨겨 선물을 보내곤 했다.

얘기가 나온 김에 외할머니 도미니끄의 시댁에 대해 물으니 브르타뉴 출신으로 대대로 선원 집안이었다고 한다. 외할머니의 시아버지 에밀 에방(Émile Even)은 어린 나이 때부터 해군 유년 학교에 입학했고 나중에는 해군이 되어 아시아와 중국 등 세계 각지를 누비며 항해했다. 제2차 세계 대전 중 에밀은 레지스탕스 조직인 ‘마키(Maquis)’에 합류했다. 브르타뉴 지역의 레지스탕스 활동은 프랑스 내에서 가장 활발했는데 ‘자유 프랑스군(Free French Forces)’ 대원의 거의 절반이 브르타뉴 출신이었으며, 이 지역은 주요 작전의 무대이기도 했다. 당시 상황은 극도로 위험하여 레지스탕스 대원들은 처형, 고문, 강제 이송의 위협에 시달렸고, 독일군의 보복은 민간인을 대상으로 하기도 했다. 에밀은 그 모든 위험을 뚫고 살아남았다.

이 두 가족의 후손들은 이 비범했던 양가의 삶을 오래도록 기억하게 되었다. 에밀의 아들 장이브(Jean-Yves)와 수앙의 딸 도미니끄는 결혼하여 1967년에 로희의 어머니를 낳았다.

로희의 어머니와 아기 로희 작가
  • 이하는 로희 작가와의 인터뷰

팥> 어머니의 집안에 중국 문화가 내려오는 게 있었나요?
로희> 여러 가지 작은 특징들이 있었는데 정말 세세한 일들이었죠.
-실내에서 신발을 신은 적이 없어요, 언제나 입구에서 신발을 벗었어요. 어떤 프랑스 가정들도 그렇게 하지만 대부분 그렇지 않거든요.
-제가 어렸을 때 할머니의 옥 목걸이를 받았어요. 중국에서는 흔히 아이가 태어나면 주는 선물입니다.
-할머니의 남동생이 지금 아흔이신데 태국에 살고 계세요. 그래서 저는 8~17살 사이에 태국에 10여 차례 갔었어요. 우리 가족은 언제나 아시아 여행을 즐겼고 어머니는 저를 임신하고 계셨을 때도 아시아 여행 중이셨어요. 그래서 전 옛날부터 아시아 요리를 자주 먹었고 대부분 젓가락으로 먹었어요. (팥이 함께 식사할 때 보셨겠지만 저는 어머니한테 아주 어렸을 때부터 배웠어요!) 그리고 가끔 매운 양념도 즐겼어요. 그래서 그런지 대부분의 친구들에 비해 저는 매운 것을 잘 먹는데 프랑스 요리는 매운 경우가 드물거든요. 또 프랑스 가정으로서 드물게 언제나 집에 큰 쌀 자루(아마도 10~15킬로 짜리)가 있었어요. 어머니가 요리에 곁들인 건 빵이 아니라 주로 밥이었어요.
-크리스마스나 생일 때, 용돈을 조금 받곤 했는데 언제나 중국식 붉은 봉투(홍바오)에 넣어주셨어요.

김장조끼를 입은 온가족

팥> 흥미롭네요. 결국 로희의 예술세계에 아시아 영향이 꽤 있나요?
로희> 간접적으로 아시아의 영향이 있다고 생각해요. 아시아의 현대미술이든 고미술이든 그 전반의 미학이 마음에 들고 아시아 나라들의 갤러리를 다니며 좋아하는 작가들을 발견했어요. 아울러 홍익대 동양화과에 한 학기 동안 교환학생으로 한국에 왔었어요. 제 시선과 예술적 감각에 자연스레 스며드는 영향들이 있었지만 그렇다고 아주 의식적으로 추구한 것은 아닙니다.

팥> 한국에서 지내면서 느낀 특히 유럽과 다른 문화적인 측면이 있으신가요?
로희> 솔직히 별로 자세히 관찰을 안하는 편이에요. 다른 나라, 다른 문화라는 인식이 있으니 열린 마음으로 새로운 나라에 도착합니다. 그래서 차이점이 있다 하더라도 크게 놀라지 않고 이곳에서 보내는 순간들의 일부로 받아들입니다. 사실 일상생활에서는 문화적인 차이를 크게 느끼지 않아요. 물론 차이점도 있지만 특별히 적응하느라 노력할 정도는 없었어요. 모든 게 자연스럽게 잘 지나갔어요.

한국을 사랑하는 모녀

팥> 그럼 한국에서 가장 만족스럽고 또 어려웠던 일은 무엇이죠?
로희> 한국에서 만족스러운 건 아주 많죠! 음식과 특히 발효의 문화를 좋아합니다. 요리와 반찬이 너무 다양해서 발견하는 재미가 있어서 끝없이 영감을 받고 있어요. 프랑스에서 제 스스로 김치를 담아먹고 다른 반찬도 만들어 먹고 있어요. 한국음식에 대해 정말 큰 열정을 갖고 있어요 🙂 예술적인 면을 보자면, 너무나 흥미로운 것이 많고 공예 분야도 정말 재밌어요! 지난 번 전주로 여행가서 방짜 유기 물건들을 사왔는데 정말 멋집니다.
또 한국에 산이 많은 점이 좋고 도심에도 여름에 녹지대가 풍부하고 가을에는 황금빛 은행나무, 봄에는 벚나무 광경이 훌륭합니다.
문화적인 관점에서 볼 때, 한국의 질서 정연한 분위기가 정말 마음에 듭니다. 그렇다고 해서 지나치게 경직된 느낌도 아니죠: 지하철은 깨끗하고 안전하고, 거리 곳곳에는 비상 호출 버튼이 달린 CCTV가 있고, 사람들도 대체로 규칙을 잘 지킵니다. 저도 대체로 그런 편이지만, 프랑스 일부 지역에서는 그렇지 않거든요.
어려운 점은 제 고향음식을 한국에서 자주 먹을 수 없다는 점이죠. 프랑스에서는 거의 지방에 살았기 때문에 늘 작은 텃밭이 있어 과일과 채소를 길렀거든요. 저한테는 텃밭이 중요하니까 이 부분이 아쉬워요. 문화적으로는 딱히 어려운 점이 생각나지 않으나 저는 한국기업에서 일하는 것이 아니니 만약 그렇다면 어려울 수도 있겠네요!

*

로희 작가가 이번 체리암 전시(2026년 10월 17일 – 25일, 20일 휴관)에서 선보이는 그림을 위해 직접 식물 염료 만드는 과정을 다음 사진들로 살짝 보여주었다. (프랑스 비아리츠 작업실) 아울러 작가는 이러한 내용으로 생명다양성재단에서 10월 16일 <식물로 식물 그리는 화가> 강연을 하게 되었다.

천연 염료 노트. 갈매나무 연구 중.
  • 글 로희와 팥
  • 사진 로희 드노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