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흥

어느새 이곳에 머무른 지도 6개월이 지났다. 이곳에 머무르기 전에는 3호선의 종점인 대화역 인근에 살았다. 서울의 대학원에 진학하기 위해서였는데, 서울에 살기에는 방값을 감당할 수 없어 ‘종점에서 살면 더 싸겠지?’라는 안일한 생각으로 방을 보러 광주에서 올라왔던 여름이 2년 전이다. 어떤 곳에 머무르게 될지 기대하는 마음도 잠시, 몸을 들이는 집마다 어서 나가고 싶은 생각만 들었다. 그렇게 넓은 수도권의 좁은 현실을 깨닫게 된 뒤, 겨우 다섯 평 남짓한 방을 계약하고 광주로 돌아갔다. 그리고 이사 당일, 십 년을 넘게 탄 자동차에 짐을 욱여넣고서 다섯 시간 동안 먼 길을 올라왔다. 그렇게 혼자 한 달, 두 달, 넉 달…… 혼자의 시간이 쌓일수록 나는 외로워졌다. 나라는 혼자는 혼자의 밀도를 높일 수 없었고, 겨울이 될 때쯤 방에 당도한 결로와 벽지의 곰팡이로 인해 축축하고도 시큼한 생활을 오래 이어가게 되었다. 그때부터 조금이라도 창문을 열어두는 습관을 가지게 되었지만, 한 번 퍼진 곰팡이는 주체할 수 없는 속도로 방을 물들였다. 그리고 짙어졌다. 나는 한참을 노력해도 가질 수 없던 밀도로. 그래서 어느 날에는 결심하게 된 것이다.
옮기자. 방을. 그리고 나의 몸을. 이곳에서 저곳으로.
몸을 옮기자고 다짐한 후로부터 머무르고 있는 방에서 한순간이라도 일찍 나가고 싶은 생각만 들었다. 머물러야 하는 곳에 머무르고 싶지 않은 마음이 들 때. 악몽을 자주 꾸었고 오래 뒤척였다. 그때의 나는 현실의 여러 문제로부터 체득한 슬픔을 어찌할 수 없는 상태에 놓여 있었고, 몸에 쌓인 슬픔을 다 털어내지 못하고 돌아온 방에서는 다시금 시큼한 냄새가 났다. 종종 나는 내 몸이 싫었다. 실컷 울면 몸에 쌓인 슬픔이 빠져나갈까? 울음과 슬픔이 다른 종류의 것이라는 걸, 어느 날 한 사람이 내게 알려주고 떠났다. 머무를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그런 생각을 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청약에 당첨되었다. 드디어 이곳을 떠날 수 있게 되어 기뻤는데, 그때도 나는 혼자서 해결할 수 있는 일이 없다는 걸 알았다. 누군가 뻗어준 손으로부터 나는 나의 머무름을 벗어날 수 있구나. 타인, 그 존재가 섬뜩하도록 멀게 느껴지던 날이 있었는데, 그래서 아주 먼 사람이 되어보자고 생각하던 날도 있었는데. 나는 어느새 맞잡고 있었다. 슬픔을 한 아름 손에 쥐고서.
그 손을 언제고 맞잡아 준 사람 몇의 손을 빌려 짐을 옮겼다. 다음에 살 사람을 위해 물건을 몇 가지 두고 왔다. 한 번 사용한 물건에는 그 사람의 기억이 달라붙어 온전히 그곳에 살아갈 사람의 것은 되지 못하겠지만, 기억을 축적하고 덧대는 것으로 그 물건들은 더욱 견고히 그곳에 자리를 잡겠지. 그런 작은 희망을 품은 채 새로운 동네에 들어섰다. 옮겨온 짐을 새로운 장소에 정착시키는 일. 그런 일을 가능하게 하는 건 언제나 몸을 움직이게 하는 마음으로부터 시작되었다. 그리고 사람들은 마음 쓰는 일을 너무나 성실히 수행했다. 함께 조립을 하고, 그래 네가 이제부터 살 곳은 이곳이구나, 네가 사는 곳을 마주한 것으로 너의 살아감을 응원할 수 있게 되었구나, 말하는 듯한 움직임들. 그것이 여태 나를 이곳에서 별다른 아픔과 슬픔 없이도 살게 하고 있다.
아침의 햇빛 덕분에 암막 커튼을 사게 되는 기쁨, 암막 커튼이 내려준 어둠 덕분에 간접등을 들이게 되는 기쁨, 간접등을 들이게 된 덕분에 “너의 집에 머무르고 있으면 꼭 모닥불 앞에 있는 기분이 들어” 하는 말을 듣는 기쁨. 그렇게 나는 한동안 밝음을 기쁨으로 간주했다. 볕이 잘 들지 않는 축축한 방에서 벗어나니 때로 그곳에서 머무른 날들이 누군가 전해준 소문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런 생각은 다시 하지 않기로 했다. 나의 머무름과 있음을 내가 소문처럼 여긴다면, 누가 그 시간 속의 나를 믿어줄 것인가? 나와 관계를 맺은 장소를 내가 믿지 않는다면, 그곳에 오갔던 여러 사람의 있음 역시 누구도 믿지 않을 것이다.
축축함을 받아들이다. 슬픔을 믿다. 외로움을 홀로 두지 않는다.
일력을 뜯어내면서 어제의 나를 잠시나마 복기해 본다. 원흥에 온 이후로는 어제의 나를 떠올리는 일에 어떤 불편함도 겪지 않게 되었다. 기억 없이 장소는 존재할 수 없듯이, 나는 이곳을 하나의 장소로 만들고 싶어 자꾸만 어제를 잊지 않기 위해 애를 쓰게 된다. 그리고 그 기억 속에는 당신이 있다. 나는 멋대로 당신이 기억 속에 그저 있는 게 아니라 머무르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면 나도 장소가 될 수 있을까? 살고 싶다 말하는 당신에게 살고 있는 곳이 되어갈 수 있을까. 우리는 어둠 속에서 눈을 뜨고 밝음 속에서 눈을 감는다. 보이지 않을 때 볼 수 있는 것들에 집중한다. 그리고 생각해보는 것이다. 누구도 머무르고 싶다 말한 적 없는 나라는 장소에서 당신은 왜 살고 싶다고 말하는 것일까.
그것을 알아가기 위해 쓴다.
무엇을 쓰고 있으면 몸과 마음은 꼭 그 세계에 이미 들어가 있는 기분이 든다. 그래서 어떤 날에는 내가 평생 살아도 가볼 수 없다고 여겨지는 곳에 관해 쓴다. 장소가 아닌 공간에 관하여. 사람이 아닌 사랑에 관하여. 기쁨이 아닌 슬픔에 관하여. 어느 저녁, 길게 이어진 천을 따라 숨을 헐떡이며 달리던 날을 떠올리면서. 돌아갈 힘을 남겨두지 않고 더 많은 곳까지 발을 뻗으면서. 시월의 아무 일도 없는 저녁에 함께 이곳을 걷고 싶다. 그렇게 한참을 걸려 돌아온 집에서 나는 여전히 혼자였지만, 이곳에서 나는 누군가가 아닌 당신이라는 명확한 대상을 기다리는 사람이 되어갔다. 기다리면 돌아올 당신이 있다는 기쁨. 있음으로 계속되는 오늘. 내가 이루고 싶은 장소는 아무래도 그런 일이었던 것 같다.

- 글과 사진 장대성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