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체리암과 예술가와 땅: <아힘사에 부치는 편지>전을 마치고
아힘사अहिंसा
모든 생명을 해치지 않는다는 의미의 산스크리트어. 야생신탁 사유지 1호 땅의 숲을 지키기 위해 손끝에 흙을 물들인 김명숙 화백이 붙인 이름이다.

지난 6월 초, 체리암에선 인간-비인간을 가로지르는 협업으로 이뤄진 전시 <아힘사에 부치는 편지>가 열렸다. 이 전시의 참여작가는 한 시인과 한 그림작가와 한 땅이었고, 전시의 주인공은 또 다른 땅이었다. 참여작가로 참여한 땅은 생명다양성재단에서 리와일딩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실시한 파주 야생신탁1의 땅이고, 전시의 주인공은 야생신탁 사유지 1호2로 인증된 청주의 땅 ‘아힘사’이다.
1 야생신탁은 부동산인 땅을 생명공동체로 되돌리고자 수행한 땅해방운동으로서, 땅과 그곳의 생명들이 제 갈 길을 찾아갈 수 있도록 그저 내버려두는 적극적 방치를 목표로 하였다. 생명다양성재단은 시민들과 힘을 모아 파주에 위치한 400평이 조금 넘는 땅을 구매한 후 땅에 대한 모든 권리를 그 땅의 야생에게 신탁하였다.
2 생명다양성재단은 생명공동체 그 자체인 야생신탁 땅을 늘리고자 올해 ‘사유지 인증 협약제’를 신설하여 운영해 왔다. 이 제도는 자신이 소유한 땅이 야생 본연의 길을 갈 수 있도록 그 시작을 열어주고자 하는 이들을 모아 야생신탁 운영의 노하우를 나누기 위해, 생명공동체 그 자체인 땅들의 존재를 세상에 드러내기 위해 시작되었다.

이 전시는 아힘사에게 바치는 시와 그림과 편지로 이루어졌다. 체리암의 나무 대문을 열고 들어가 자갈이 깔린 아담한 중정으로 걸어들어가면 전시 서문이 작은 종이에 담겨 있다. 그것을 들고선 한옥 내부로 신발을 벗고 들어가면 박은지 시인의 시 「숨과 숲 – 아힘사」가 정갈한 글씨로 한지 위에 쓰여 있다. 이 시는 시인이 지난 4월 청주 아힘사에 방문한 뒤 쓰여졌다. 그 땅을 사고, 그 땅에 아힘사라는 이름을 붙여준 김명숙 작가의 이야기, 아힘사에 사는 생명들의 이야기가 담겼다. 시의 전문은 곧이어 체리암 7월의 나무 시로 소개될 것이다.

시가 펼쳐진 책상 왼쪽 벽에 김희라 작가의 그림 ‘아힘사’가 걸려있다. 버드나무 씨앗이 눈처럼 날렸던 4월의 아힘사 풍경이 담겼다. 그 속엔 큰 나무들이 그늘을 만든 축축한 습지 땅, 중간중간 나무를 타고 올라간 으름덩굴, 나무 위 큰오색딱따구리, 이끼 서식지가 된 땅 위 고목 등을 볼 수 있다.
그림에서 왼쪽으로 눈을 돌리면 체리암의 명당이다. 서울 시내가 한눈에 보이는 시원한 창문이 훤히 열려 있다. 그런데 매시간 정각, 15분, 30분, 45분마다 서울 한복판에 어울리지 않는 소리들이 들린다. 바로 야생신탁 땅의 소리이다. 이 소리들은 각각 야생신탁 땅의 이른 아침 소리, 한낮의 소리, 한밤중의 소리, 새벽의 소리다. 창문 앞 의자에 앉아 왼쪽을 보면 목재 고가구 위에 야생신탁 땅이 아힘사에 쓴 편지가 놓여있다. 우표가 붙은 쪽을 뒤집어 보면 내용이 나온다. 정기적으로 울리는 소리들은 땅의 목소리 그 자체이며, 그 편지들은 그 목소리를 번역한 것이다.

이른 아침에 쓴 편지
아힘사, 안녕하세요. 이곳은 파주입니다.
이 땅이 다시금 야생의 길에 오른지 1년 하고도 7개월이 넘었어요.
숲이었던 이곳의 나무가 베어진 후 쓰레기가 쌓이고 가건축물이 생기고 다시 야생의 생명들이 자유롭게 피어나기까지 10년 이상을 기다려야 했지요.올해 봄은 야생신탁 땅으로서 맞이한 두 번째 봄이었습니다.
이맘 때 가장 즐거운 일은 새들의 새벽합창을 듣는 일입니다.새벽까지 이어지는 봄 밤의 친구 소쩍새의 노래가 흐릿해질 무렵 박새, 붉은머리오목눈이, 큰오색딱따구리, 꿩, 산솔새, 까치, 까마귀 등이 목청껏 노래하지요.
‘새들의 노래는 대지의 시’라는 말이 있다지요? 복잡하고도 아름다운 새들의 노랫소리를 듣다보면 그 말이 절로 공감이 됩니다.아힘사는 산기슭에 위치한 묵논숲이고, 멀지 않은 곳에 건천도 있다고 들었어요.
아힘사 숲 가운데에는 커다란 버드나무가, 주변부에는 은사시나무들이 있어 새들이 그 사이를 오가기도 한다구요. 그곳의 새벽합창은 어떤지 궁금하네요.
언젠가 그 소식을 들을 수 있게 되길 희망합니다.야생신탁 파주 땅으로부터.
2026년 4월 26일. 오전 5시 25분 씀.
낮에 쓴 편지
아힘사, 안녕하세요.
우린 사람들과 꽤 긍정적인 관계를 맺고 있는 땅이라는 점에서 공통점을 갖고 있어요. 아힘사에겐 김명숙 작가님이 있고, 제게도 그와는 조금 다르지만 밀접하게 관계를 맺고 있는 여러 사람이 있답니다.야생신탁 땅엔 종종 라디오나 트로트 음악 소리가 들려요. 야생신탁 땅 이웃집에서 흘러나오는 소리지요. (트로트 음악과 꾀꼬리가 함께 노래하는 땅! 그곳이 바로 접니다!) 이 마을에서 수 대째 살아오신 옆집 아저씨는 야생신탁 땅의 과거를 기억하고 계신 분이에요.
올해 봄 야생신탁 땅 바로 앞에 오소리가 나타났는데요! 옆집 아저씨가 ‘이 땅이 숲이었을 땐 오소리를 종종 보았으나, 나무들이 베어진 이후로는 본적이 없다’는 말을 하시는 걸 들었어요. 오소리가 저를 다시 찾아와 준 것도 무척 기뻤지만, 저 말고 제 과거를 기억하고 있는 이가 있다는 사실도 왠지 든든하던걸요.
주기적으로 저를 찾는 사람들도 있답니다. 야생신탁 시민모니터링단, 생물분류군별 전문조사단은 거의 매달 와요. 봄엔 야생신탁 땅을 함께 산 후원자들이, 계절이 바뀌는 때가 오면 야생신탁 땅과 주변에 누가 살고 있는지 궁금해하는 사람들이 찾아와요.
야생의 길을 찾게 해주겠다면서 사람들이 저를 자꾸 찾아오는 게 맞는지 묻는 이들도 있더라구요. 그런데 저는 그 사람들이야말로 야생과 인간 사이의 관계를 재설정하는데 앞장서줄 이들이라고 믿어요!
야생신탁 파주 땅으로부터.
2026년 5월 7일, 낮 2시 5분 씀.

밤에 쓴 편지
아힘사, 안녕하세요.
‘모두가 잠든 깊은 밤’과 같은 명사구는 우리에게는 해당하지 않는 말이지요. 달빛 아래 펼쳐진 땅의 무대에 새로운 주인공들이 등장하니까요. 공감하시리라 믿어요.
밤은 무척 흥미로운 시간 같습니다. 좀 더 저다워지는 시간 같아서요. 특히 계절마다 찾아오는 손님이 생길 때는 더 그렇게 느껴집니다.
올봄엔 소쩍, 소쩍 노래하는 소쩍새와 무척 친하게 지냈어요. 매일 밤마다 그 노래가 저를 가득 채웠죠. 쏙, 쏙, 쏙, 쏙 노래하는 쏙독새도 가끔 찾아와 줬어요. 둘다 곤충을 좋아하는 친구들인데, 아무래도 저와 제 주변에 곤충이 많은 듯 해요.
지난해 봄 이후 여러 식물들이 찾아와 땅의 흙을 덮어주기 시작한 이후 흰넓적다리붉은쥐, 멧밭쥐, 우수리땃쥐, 작은땃쥐도 찾아와 줬어요. 이들도 거의 야행성인 것 같더라구요. 그러고보니 오소리나 멧돼지도 야행성이네요.
이렇게 되니 왜 사람들이 밤을 야생의 시간이라고 부르는지 알 것 같아요.
야생을 위한 시간이 자연스레 존재하듯, 우리와 같은 야생을 위한 공간도 좀 더 자연스레 존재하면 좋겠어요.그런 날이 오겠지요?
야생신탁 파주 땅으로부터.
2026년 5월 15일, 밤 11시 45분 씀.
새벽에 쓴 편지
아힘사, 안녕하세요.
인간에게 어두운 새벽은 참으로 무거워 보입니다. 그 어두움은 어두울 대로 어두워졌다가 다시 조금씩 빛을, 하루를 받아들이려 하는 어두움입니다. 그 무거움은 눈에 빤하고도 훤히 보이는 온갖 세상사 속으로 굳이 다시 걸어들어가 생명으로서 갖는 의무 즉 살아남아야 한다는 무의식적 결의를 품고 있는 무거움입니다.
저는 새벽에 내리는 비를 좋아합니다. 새벽의 그 무거움을 덜어주는 듯 해서요. 가끔 긴장을 느낄 만큼의 센 비도 있지만 것도 나름대로 멋지지요. 그제 새벽엔 세찬 비가 왔어요. 그 소리는 모든 것을 압도하는 듯 했습니다. 요새 매일 밤마다 들리던 소쩍새 소리마저 들리지 않아 모두가 몸을 피해 숨죽이고 있는 것이 오롯이 느껴졌습니다. 그렇지만 오늘과 같이 추적추적 비가 내리는 날엔 왠지 여유가 느껴집니다.
그 무겁고도 고요한 새벽의 정적을 깨는 건 주로 동물들이지요. 오늘도 옆집 개가 사납게 짖는 소리가 공기를 갈랐습니다. 오소리나 멧돼지라도 온걸까요? 그랬다고 해도 놀랄 일도 아니지만요.
밤이 되면 기지개를 켜고 돌아다니는 동물들을 보면 어두운 새벽은 오히려 가벼울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빛이 보여주는 것에 휘둘리지 않고 단지 살아나가고 있는 그 모습이 말입니다.
아힘사의 새벽은 어떤지 궁금하네요.
야생신탁 파주 땅으로부터.
2026년 5월 7일, 새벽 2시 5분 씀.
서울 풍경이 펼쳐진 창문을 뒤로 하고 안쪽 방으로 들어가면 소파가 보인다. 소파 왼쪽엔 아힘사의 풍경이 담긴 사진 앨범과 아힘사를 돌보고 있는 김명숙 작가의 작품집이 있다. 중정쪽에 난 창문 앞 책상에는 노트와 펜이 올려져 있는데, 이 곳에서 관람객들은 아힘사에게 편지를 쓸 수 있다. 사람들의 편지가 담긴 노트는 시, 그림과 함께 전시가 끝난 후에 모두 아힘사에 보내질 예정이다.
이 전시를 떠올리면 아름다운 한옥 공간 체리암이 생명과 예술이 뿜어내는 창조의 에너지를 든든히 품어주고 있는 모습이 그려진다. 체리암은 그 전시에서 또 하나의 주체로서 이 전시를 준비한 사람들과 참여작가들, 주인공 땅에게 말하는 듯 하다.
‘우리 계속 이렇게 아름답자! 살아가자! 창조하자!’

- 글과 파주 땅의 편지 번역 박지연
- 사진 박정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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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 개요]
전시 기간: 2026.06.02.-06.11.
연계 행사: <예술가들에게 듣는 아힘사 이야기> (2026.6.3.)
주최: 생명다양성재단
공간 후원: 문화거실 체리암
기획 및 진행: 박지연 연구원
포스터 및 주 디자인: 이상미 디자이너
설치 및 도움: 오예지 야생신탁 시민모니터링단 팀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