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옥란, 우리 할머니 이제 편히 쉬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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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할머니께서 돌아가셨다. 향년 89세. 조문객들은 길어 보이는 그 세월에도 탄식하고, 슬퍼했다. 한세상 살다 가는 것에 시간의 길이는 중요하지 않았다. 한 사람의 딸이었고, 한 사람의 엄마였으며, 한 사람의 할머니이자, 한 사람의 친구였던. 그 존재의 사라짐은 누구에게나 깜깜할 정도로 차오르는 눈물로도 채워지지 않는 공백이 되었다.

할머니는 생전에 나를 보시곤 눈물을 훔치시곤 했다. 막내이자 늦둥이로 태어났던 나는 왠지 모르게 많은 사람들의 아픈 손가락이었다고 한다. 어머니와 아버지께서 버티셨던 세상의 한켠에 놓여 꼼지락거리는 나의 유년이 당신들의 고통을 조금은 녹였던 것일까? 그게 아니라면 호환마마보다 무서운 가난 속에서도 무럭무럭 자라는 나의 몸덩이가 당신들의 삶을 포기할 수 없게 만들었던 것일까? 흐릿한 기억 속에, 사랑하지만 대화를 곧잘 나눌 수 없었던 경상도 아버지와 경상도 아들놈 사이에, 의지할 사람이라곤 어머니뿐이었으면서 틈만 나면 성질이나 부리던 어리석은 사춘기 시절에, 할머니의 눈물 짓는 미소가 책갈피처럼 끼어 있다. 그 장면을 열어 보니, 우리 지금보다 더 후줄근했고, 지금보다 더 가족이 뭔지 몰랐네.
경주 장항리. 불국사 가는 길 토함산 굽은 도로를 멀미하며 넘어가면 좁은 2차선 갓길에 얇은 강판으로 된 기와 모양 지붕이 덮인 집이 있다. 우리 외할머니집. 설날 아니면 추석 말일에 우리는 그곳에 들러 잠깐 앉았다 가곤 했다. 할머니는 밥은 먹었냐면서, 이것저것 많이 내어주셨다. 동그랑땡, 산적 부침, 송편, 튀김, 땡감과 귤, 밥과 국. 안방 옆에 부엌으로 통하는 미닫이문이 쉴 새 없이 열렸다 닫혔다. 우리는 이제 너무 배부르다고 도저히 못 먹겠다고 항복 선언을 하곤 했다. 그래도 할머니는 하나라도 더 먹으라고 이쑤시개로 사과를 쿡 찍어 나의 손에 쥐여주시곤 했다. 우리는 그 좁은 방에 옹기종기 앉아서 텔레비전도 보고 옛날이야기도 하고, 어떤 학교를 가고 싶고, 어떤 사람이 되고 싶고, 어떤 날들이 앞으로 더 많아졌으면 하는지 서로의 안부를 허겁지겁 나눴다. 그리고 알루미늄으로 된 창틀 틈새로 겨울의 스산한 새벽 공기가 좁은 마루로 흘러들어오면, 아버지는 붉은 얼굴로 담배를 태우셨고 어머니는 외할머니 옆에 기대앉아 바깥을 넌지시 바라보시곤 했다. 우리는 무엇이 그리도 재밌었는지 아옹다옹 농담 따먹기나 하면서 안방에서 쪽방으로 건너다니며 놀았다. 그러다가 “이제 가자” 어머니 한마디에 모두가 일어서곤 했다. 외할머니가 도로에까지 나와서 우리를 배웅하면 우리는 도로를 아예 점거해 버리곤 연신 고개를 숙이며, 손바닥을 흔들며 인사를 했다. 그래도 참 조용했다. 안온하고 평화로웠다.
입관하는 날. 외할머니께서 허리가 많이 굽으신 상태로 돌아가셨다고 했다. 그래서 다 펴지지 않았다고. 그 모습을 보면서 할머니가 꼭 아기 같아서 많이 울었다. 어머니가 할머니를 껴안고 아이처럼 우는 모습을 또렷하게 다 볼 수는 없었다. 너무 슬프다는 것은 그런 걸까. 곁눈질로 잠깐 피해 보아도, 고개를 주억거리며 잠깐 숨을 쉬어보아도, 나아지지 않는 시간이었다. 그때는 하늘도 잠깐 흐렸다. 외할머니 다녀가시나 보다 했다. 마지막까지 자식들 힘들까 봐 눈물은 참으시나 보다 했다. 붉으락푸르락 햇살이 구름을 휘감는 후텁지근한 여름날이었다. 남자들은 완장을 차고, 여자들은 머리핀을 꽂고, 완장을 오른쪽에 차는지 왼쪽에 차는지, 결혼한 사람은 몇 줄로 차는지 토론이 한창이다. 머리핀은 또 오른쪽에 꽂는지 왼쪽에 꽂는지, 머리를 묶어야 하는지 풀어도 되는지 토론이 한창이고. 진지해서 더 웃음이 쿡 나버리는 동안, 3일은 후루룩 흘러가 버린다. 나는 할머니 영전에 향이 하나씩 톡톡 자기 몸을 꺾을 때마다 외할머니의 삶이 그것과 같았으리라 생각했다. 한 시절 꺾고 나면 또 한 시절 파도처럼 밀려오는 세월 속에서 바다가 되기로 한 여성을 오래 생각했다. 때로는 사나워지기도 했겠지. 때로는 아파도 참아야 했겠지. 그것보다 몇 곱절은 기쁜 딸의 얼굴과 아들의 얼굴을 생각하며 꿈에 들기도 했겠지. 그때마다 한 뼘씩 꺾이는 몸이었을지라도, 아마 영영 아름다웠을 거야. 영영 행복할 거야. 생각했다.

외할머니를 모시면서 외할아버지를 함께 모셨다. 쾌청한 하늘 아래 싱싱한 나무들이 따스하게 감싸고 있는 양지였다. 어머니는 당신의 ‘엄마’에게 이제 ‘아부지’랑 푹 쉬시라고 하셨다. 하늘에서도 우리를 잘 돌봐주시라고 하셨다. 나는 어느 때보다 그 말이 퍽 슬펐네. 이제 하늘 보면 떠 있는 별들이 다 우리를 돌봐주는 것 같이 느껴져서 슬펐네. 우리도 언젠가 그 틈에 끼어 아이들을 돌봐줄 날 오면 퍽 기쁘겠지 생각하니, 말할 수 없이 슬펐네. 헤어지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런 어리석은 생각이 들어버렸네. 그래서 또 할머니를 매만져도 못 보고 두꺼운 석판을 덮어버렸다. 어른들의 어깨 너머로 조용히 기도만을 올렸다. 할머니 먼 길 가 계신 그곳에서 할아버지와 알콩달콩 행복하세요. 저희는 신경 쓰지 않으셔도 돼요. 할머니가 주신 정으로 저희는 이미 훌륭해요. 울 줄 알고, 사랑할 줄 알고, 견딜 줄 알고, 행복할 줄 알거든요. 할머니 먼 길 가 계신 그곳에서 허리 쭈욱 펴시고 가끔 춤도 추시고 할아버지와 와락와락 서로 많이 안으면서 행복하세요.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조카 녀석들이 외할머니 영전에 나란히 서서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었던 장면을 오래 떠올렸다. 휴대폰을 켜서 녀석들의 서투른 몸짓과 해맑은 목소리를 카메라 담으며 우리는 웃다가 울다가 난리도 아니었다. 오랜만에 모여 보니, 우리도 벌써 엄마와 아빠였고, 사랑하는 사람과 영원을 약속한 지 오래였고, 저마다의 고달픔을 어깨에 진 채 가족에게는 내색하지 않는 어른이 되어 있었다. 외할머니는 그런 우리가 자랑스러웠던지, 참 맛있는 음식을 밤새도록 내주셨다. 그 사흘 동안 잠깐이지만 분명히도, 영전 뒤편의 문이 열렸다 닫혔다.
- 글 김웅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