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 곳을 바라보고 있으면 어느새 그곳의 먼 사람이 나를 지켜보고 서 있다. 그런 착각으로부터 나는 며칠간의 체류를 위한 짐을 싸고, 그곳에서 가야 하는 장소들을 찾아보고, 꼭 먹어야 하는 음식 리스트를 정리해 본다. 물론 막상 도착해서는 발 닿는 곳에 들어가 손 닿는 것들을 집을 테지만. 떠나기 위해 하는 정리와 머무르기 위해 하는 정리는 손에 들어가는 힘이 미세하게 달라진다. 떠날 때는 몸에 힘을 풀고, 머무를 때는 몸에 힘을 주어야 하는데 나는 항상 반대로 움직여서 떠나야 할 때 떠나지 못하고 머물러야 할 때 머무르지 못했다. 그래서 머물러야 하는 사람은 떠나가고 떠나야할 사람은 머물렀던 것도 같다. 그때 문득
한 사람은 하나의 장소로 남을 수 있겠구나, 생각했다. 어떤 사람을 기억 속에서 길어 올릴 때 나는 그의 표정과 말투보다도 먼저 그와 머물렀거나 떠나갔던 장소를 떠올린다. 함께 가보지 않았는데도 매번 특정한 장소가 떠오를 때도 있다. 그래서인지 제주에 도착하자마자 그가 떠오른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초봄의 제주는 처음이었는데 금세 아름다운 풍경 속에 빠져들었다. 유채와 동백, 풍차와 바닷가, 들판 위의 말과 소 떼들. 한곳에 오래 머무르기보다 이곳저곳을 돌아다녔다. 그럼에도 기억에 남는 장소들이 몇 있다.

협재해수욕장
삼 년 전쯤 이곳에 왔었는데, 그때와는 전혀 다른 풍경이 펼쳐져 있었다. 공사가 한창이었는데 그럼에도 사람이 많았다. 해변에 들어섰는데 수많은 돌탑이 눈앞에 놓여 있었다. 언제 이런 돌탑들이 쌓인 거지? 해풍에도 미동 없이 자리를 지키는 돌탑들을 잠시간 바라보다 보니 자연스럽게 기도하게 되었다. 때로는 눈을 감고 있을 때 볼 수 있는 풍경들이 많다. 어떤 소망이나 욕심 어린 마음을 빌어야 할 때가 되면 나는 언제나 그를 떠올린다. 그의 건강을, 안정을, 그리고 즐거움을. 그러나 언제나 절반뿐인 바람으로 남기 일쑤다. 구태여 돌을 올리지는 않기 때문에. 닿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누군가를 위해 진심으로 무언가를 빌 수 있는 사람이 되어가고 싶기도 해서. 그와는 한 차례도 바닷가에 와보지 못했다. 그런 사람이야 많지만 유독 기억 속에서 그가 지워지지 않는다. 나는 그가 바다의 넓음과 참 잘 어울리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언젠가는 함께 바다에 와서 모래사장에 발자국을 남겨보고 싶었는데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생각 속에서는 몇 번이고 실행해서 이미 그렇게 되었다고 착각하게 되는 일들이 있는데, 그와 함께 바다에 오는 것이 그중 하나이기도 했다.
해변에 길게 늘어져 있는 사람들을 잠시간 바라보았다. 한 사람 한 사람이 모두 어딘가에서부터 이곳에 도착하기 위해 발을 뻗었겠지. 맞잡은 손을 흔들면서 흔들리지 않는 굳건한 마음을 갖게 되었겠지.
돌탑은 조용했다. 조용히 모든 것을 듣고 있었다.

사려니숲길
이곳 역시 삼 년 전에 왔었다. 숲길에 들어서자마자 무언가가 몸을 휘감는 듯한 느낌을 받았는데, 그것이 여태 몸에서 빠져나가지 않은 듯 종종 나는 이곳을 떠올렸다. 대부분의 장소는 떠오르는 것에서 그치기 마련인데, 이곳은 다시 가고 싶다는 마음이 매번 강하게 들었다. 숲길 안에 조성되어 있는 나무 데크 위를 계속 걸었다. 걷다가 사진을 찍고, 다시 걷기를 반복했다. 이곳에도 곳곳에 돌탑이 있어서 발걸음을 멈추게 했다. 돌탑에 돌을 올리는 사람의 손을 사진으로 남기면서, 나도 저렇게 누군가에게 조용히 쌓여가는 사람이 되었으면, 하고 바랐다. 거대한 나무들 사이로 들어오는 햇빛을 길 삼아 다시금 눈을 감고 무언가를 빌었다. 그가 좋은 곳에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가 좋은 곳이 되어갔으면 좋겠다고도 생각했다. 그래서 좋은 사람들이 그의 마당에서 오래 웃고 떠들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으면 하고.
걷다가 나무에 나뭇잎의 그림자가 걸려 있는 장면을 사진으로 찍었다. 제주에 머무르면서 찍은 사진 중 가장 많이 들여다보게 될 사진이라는 것을 그때는 알지 못했다. 그 사진을 볼 때마다 슬픔에 휩싸이리라는 것도.
왜 우리는 그림자를 보면 슬퍼지는 걸까?

수월봉
언제 와도 바람 때문에 오래 머무르지 못하게 되는 곳이다. 그러나 시원하게 뚫린 풍경을 바라보고 있자면 언제든 다시 오리라는 다짐을 하게 되는 곳이기도 하다. 나는 높은 곳을 무서워하는데 이곳에서는 왜 마음이 편해지는지 모르겠다. 어떤 장소는 내가 오래도록 가지고 있는 공포를 단번에 없애줄 때가 있다. 그리고 그가 내게 있어 하나의 장소였을 때, 그에게 향하기 위해 마주한 모든 길이 그저 즐겁고 좋았다. 나를 마주한 그는 언제나 웃는 얼굴로 내게 달려와 주었다. 그도 이런 풍경을 좋아할까? 생각해 보니 우리는 함께 높은 곳에 간 적이 없었다.
수월봉에서 내려오는 길에는 자꾸만 뒤를 돌아보았다. 돌아보면 무언가가 돌아올 것이라는 헛된 희망을 품으면서. 다만 바람이 등을 떠밀었다.

내음커피바
가장 오래 머무른 공간. 네 시간을 넘게 책을 읽고 커피를 마시며 멍하니 앉아 있었다. 며칠간 흐린 날씨, 심지어는 비가 종일 내리던 날도 있었는데, 이곳에 머무른 날은 정말이지 쾌청했다. 수첩을 들고 다니면서 어떤 장소에 머무를 때마다 짧게나마 일기를 적었다. 이곳에서는 “나는 언제든 너의 편이 되어줄 것이다.”라는 문장을 적어두었다.
공항으로
향하는 길. 모든 것이 무거웠다. 몸도, 마음도, 짐도. 나를 둘러싼 일들이 쉽사리 해결되지 않는 기분을 느꼈다. 다만 좋았던 점은 내게 돌아갈 곳이 있다는 것. 아직은 떠올리면 떠올려지는 사람이 있다는 것. 그런 사람들을 위해 나는 언제고 좋은 마음을 가지고 싶어진다는 것까지. 제주의 버스는 왼쪽 문이 열릴 때도, 오른쪽 문이 열릴 때도 있다. 나는 어느 쪽 문으로 나가게 될까 궁금했다. 언제쯤 나가야 할까. 정류장처럼, 가끔 나의 삶에 명확한 목적지가 있었으면 좋겠다. 그러나 그랬다면 나는 이곳에서 그를 떠올리지도, 혼자를 잘 돌보지도 못했을 것이다.
체크인을 하고 얼마 후 비행기에 올라탔다.
*
사람은 떠나도 장소는 떠나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사람이 아닌 하나의 장소가 되어가고 싶다. 장소가 되겠다는 말은 결국 머무르는 사람이 되겠다는 하나의 다짐으로 남는다. 나는 다 기억하고 싶다. 그러나 나는 자꾸만 기억되려고 한다.

- 글과 사진 장대성
- 사진 제목은 위에서 순서대로: 협재해수욕장, 사려니숲길1, 사려니숲길2, 수월봉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