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월23일 7:30 GS아트센서> Pat Metheny(팻 메시니)의 Dream Box/MoonDial 기타 공연, 곰과 함께 관람
체리지기들이 여행 다니면서 제일 듣기 좋아하는 음악 중에 꼽는 뮤지션이 있다. 바로 전설적인 팻 메시니가 서울에 오는데 안 갈 수가 없지. 곰이 젊은 시절부터 엄청 좋아하는 기타리스트라 팥이 예매를 하고 곰에게 비밀로 하고 있었다. 드디어 공연날 경복궁역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내려가며 얘기했더니 사실 광고 보고 은근히 이 공연이길 기대했었다고 했다. 곰은 늘 일이 원하는 대로 된다!


나는 개인적으로 이 음악가를 ‘팥’ 메시니라고 부른다. 왜냐하면 우리가 서촌의 유명한 팥빙수집 ‘통의동 단팥’의 단골인데(서촌 주민 치고 단골이 아닌 사람이 없겠지?!) 그곳을 가면 한 벽면에 온통 메시니의 CD가 가득 차지하고 있고 당연히 그의 재즈음악을 자주 틀어주신다. 그러니 난 자연스레 팻을 팥이라 부르게 되었다. 이 팥빙수집은 우리의 서울살이에 중요한 곳이며 여름 도심 피신처이다. 우린 집에 에어컨을 안 두고 있으니 집 근처인 이곳을 자주 찾는다. 공연장에 도착해서 혹시 빙수집 주인 부부가 안 오셨나 두리번거렸다.
다른 공연들과 달리 관객층이 대체로 남자분이 더 많았다. 무대는 까만 천으로 가려진 물체들이 여기저기 있고 기타가 여럿 준비되어 있었다. 팻은 등장하자마자 편안한 티셔츠 차림으로 자리를 앉아 박수갈채에 ‘감사함미더’라고 인사했다. 사진보다 부피가 더 커진 회색 긴 머리가 엄청난 70세 연주자는 외모부터 압도적인 느낌이었다. 곧바로 연주를 시작했는데 첫 부분은 어쿠스틱 위주로 익숙한 선율들이 들렸다. ‘시네마 천국’ 영화음악의 주제곡도 연주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팻이 꽤나 수다스러운 양반일 거라는 상상을 하지 못했다. 음악 분위기로 보아 그냥 차분하고 조용, 쿨한 타입이 아닐까 싶었다.
그런데 이번 공연은 자기 단독으로만 공연하는 게 처음이고, 말하면서 진행하는 것도 처음이라며 운을 떼기 시작했다.(팻 메시니 그룹의 밴드 활동은 1977-2010까지) 트럼펫 연주자 집안에 태어나서 외할아버지, 아버지, 형이 모조리 트럼펫 연주자라서 자기도 8살 때 시작했다가 너무 못한다는 소리를 듣고(얘가 불면 하늘에서 새들이 떨어져!라고 형이 놀렸다고) 다른 악기를 택한 것이 바로 기타였다. 10살 때 TV에서 비틀즈의 공연을 보고 반했던 것이다. 그런데 부모님은 썩 탐탁지 않아 해서 기타를 사주지 않고 네가 용돈을 모아서 사는 것은 허락한다고 했다. 자기도 모르게 오히려 자식의 기타에 대한 열망을 더 키운 셈이 되었겠다. 이 간단한 사실에서도 느낀 바가 있다. 요즘 부모는 아마 당장 사줬을 텐데, 어떤 때는 아이도 자기 열망의 진정성을 뼈저리게 느끼도록 하는 것도 좋지 않나 싶다.
하여간 매우 어린 나이부터 시작을 했으니 팻 메시니는 지금 경력이 60년이다. 그 사이에 53개의 앨범을 냈다. 쉬지 않고 일하면서 동시에 즐긴 인생이다. Miles Davis의 Four & More 앨범을 듣고 재즈를 들이파기로 했다고. 공연 두 번째 부분이자 가장 오래 시간을 할애한 것은 바로 바리톤 기타 연주였다. 모든 기타리스트가 종국에는 바리톤 기타를 갖고 싶어한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다른 악기와 협연이 힘든 점이 있어 단독으로 연주해야 한다. 바로 한 기타가 현악4중주의 4분의 3을 다 담당해내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바이올린, 비올라, 첼로 소리가 각기 수평적으로 병행하는 셈이다. 메시니의 2003년 앨범 One Quiet Night 그리고 2011년 앨범 What’s It All About에서 솔로 연주를 바로 바리톤 기타로 했다. 역시 같은 기타로 2023년에 Dream Box 솔로 앨범을 내고 이번 투어를 하는 것이었다. 이 투어 중에 바리톤 기타에 나일론 줄을 거는 새로운 시도를 한 후에 매우 만족스러워 계속 새롭게 기타를 세팅하다가 아예 Moon Dial 앨범을 새로 또 냈다.
또 하프 소리 비슷하게 내는 42현 ‘피카소’ 기타도 연주했는데 기타 머리가 세 개나 달려 모양새가 현란했다. 메시니의 아이디어로 제작된 이 특수 기타는 만드는 데 1년이 걸렸다. 만들고 나서 사람들 반응이 피카소 그림 같아보인다고 해서 얻은 이름. 현들이 서로 교차되어 있어 너무나 희한한 모습이다. 열정적으로 희끗한 머리까지 흔드니 거대한 삽살개가 4차원의 악기를 연주하는 것 같은 이미지가 연출되어 코믹하기도 했다. 피카소의 기타 작품 찾아보니… 콜라주 치고 너무 정리정돈이 잘 된 느낌이네. 색 조합이 완벽하게 내 취향이고 구성이 참하다. (나도 중3때? 미술시간에 콜라주 천재였는데. 스케치북에 3분의 2를 흰 여백으로 둔 것을 특히 선생님이 칭찬해주심.)

메시니의 기타모습 참조 https://guitar.com/features/gallery/story-of-the-pikasso-guitar
공연 후반부에 왼손을 자주 흔들며 혈액순환이 잘 안되는 듯한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다. 그러다 사실 일주일 전까지 중국에서 응급으로 병원에 입원해 있었다며 담석증 수술로 병원에서 기타를 손놓고 있었다고 고백했다. 그러다 오늘 공연 중에 무리가 와서 물을 마셔가며 손을 흔들어 대니 70세에 마음은 굴뚝 같은데 몸이 말을 안 듣는 안타까운 장면을 목격하게 되었다. 거장의 말년을 보게 된 것이다. (할아버지가 된 가수가 돌아가시기 전에 꼭 보여주고 싶어 곰의 기타 우상인 Dire Straits의 Mark Knopfler 2019년 공연도 쫓아가서 본 적이 있다. 기가 막혔던 것은 내가 선물해서 함께 본 후 너무 고맙다고 한 곰이 나중에 기억이 엉망이 되어 자기가 노플러 공연을 알게 되어 예매해서 갔다고 아들에게 얘기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난 언제나 억울모드.)
그래서 팻이 좀 쉬는 동안 관객에게, 아무거나 물어보세요 타임을 갖자고 하니, 누가 nylon string 어디 브랜드냐고 물었다. 아르헨티나 제품인데… 극히 소수를 위한 정보이고 다른 분들께는 너무나 재미없는 내용이니 넘기자 했다. 바로 누가 이어서 제일 좋아하는 앨범을 물어보니 주저없이 Stevie Wonder의 Songs in the Key of Life라고 대답했다. (아마 질문한 이는 본인 앨범 중에 뭐냐고 물어봤을 텐데.) 그러면서 우리 행성에 스티비 원더가 존재하는 한 그 분이 음악을 책임지면 아무 문제가 없지만 그 분이 돌아가시는 날은 끝장이라고 했다. 또 재즈의 대가 Herbie Hancock도 정말 좋아한다고 덧붙였다.

어느새 잠시 퇴장 후 회복하여 사뿐사뿐 뛰어나오더니 검정 천으로 가려두었던 기타들을 짠!하며 공개하고 나서 뒷부분에 진열된 희한한 cabinet de curiosités*같은 느낌의 자가제작으로 보이는 악기들을 또 선보였다. 휘황찬란(輝煌燦爛: 부수에 빛 광 자 하나, 불 화 자 셋이나 쓰여진 표현!) 그 자체라서 ‘어른이’같은 모습으로 혼자하는 서커스처럼 엄청 재밌게 놀고 있는 장면을 마지막 무대로 연출했다. 어린시절부터 꿈꾸며 어린 팻이 난 반드시 나중에 이런 무대를 만들어야지! 했을 것 같다. 얼굴을 보면 장난기가 가득하다. 꿈은 다 이루신 것 같지만 부디 건강 회복하시길.
*불어 표현 [까비네 드 뀌리오지떼]는 신기한 물건들 진열장을 뜻하는데(경이의 방이라는 번역은 독일어에서 온 것) 영어에서도 차용해서 쓴다. 유럽 귀족들이 이국의 기념품을 집에 두고 자랑하는 용도. 불어발음은 좀 틀리게 적었지만 흥미로운 글 https://artlecture.com/article/952
메시니 공연 한겨레 기사 https://www.hani.co.kr/arti/culture/music/1199373.html
- 5월29일 7:30 카인드서울>5월 Jam Session의 날, 13분의 재즈 연주자들의 자유로운 즉흥 결합, 그야말로 jamming 현장, 곰과 함께 관람
- 잼 세션이란 연주자들이 비공식적, 즉흥적으로 연주하는 자유로운 음악회
성수동이 점점 너무 상업공간만 생겨 좀 질려서 안가다가(소비, 소비 그리고 소비!) 사진으로 보니 공간이 멋져 끌린 카인드서울이라는 재즈클럽에 가봤다. 새로 지은 건물의 5층. 일단 보통의 재즈클럽들이 지하세계에 있는 반면 뷰도 시원하게 있는 지상에 있으니 좋다. 호스트 연주자 세 분이 우선 계셨고(피아노 송수지, 베이스 임송혁, 드럼 이석현) 약간 사감선생같은 송수지의 사회로 진행되었다. 미리 지원한 연주자들이 속속들이 도착하는 시간에 따라, 기타리스트 계세요? 피아니스트 계세요? 물어보며, 즉석에서 손 드는 분을 무대로 초대해서 공연을 이어갔다. 아주 젊어보이고 대체로 학생들 같아 보였다. 편안한 차림의 연습실에 나오는 연주자 같은 모습 보니 오히려 신선했다. 사실 공연이라기 보다 실용음악과의 교내 무대에서 벌어질 법한 모습을 목격하는 자리 같아서 정말 흥미진진했다. 관객보다 연주자들이 훨씬 많았고 몇 분의 교수/평론가 같은 분위기의 사람들도 보였다. 역시 흔히 그렇지만 체리지기들은 엉뚱한 듯 아닌 듯 갑자기 너무나 인사이더만 모이는 곳 같은 데에 앉아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신선한 얼굴들이 이루는 잼 세션을 즐기며 맥주도 시켰는데 클럽 전체에 계속 닭튀김 냄새가 퍼져 ‘치킨 앤 재즈’의 밤인 줄 알았다. 팥은 집에서부터 이곳의 메뉴를 확인 후 먹을 거리가 별볼일 없다는 것을 알았기에(이 자체는 괜찮다, 어차피 음악감상하러 가는 곳이니.) 재즈클럽에서 4분 거리에 있는 르베지왕 성수에서 감칠맛 잘 살린 템페볼 식사를 하고 와서 정말 다행이었다.(템페는 콩 발효음식) 우리같이 닭 안/못 먹는 사람들에겐 이 냄새는 견뎌야 하는 장애물이다. 냄새 때문에 재즈를 즐기기 좀 힘든 수준. 결국 장소는 훌륭한데 식음료 궁합이 우리랑은 꽝이었다. 우리가 고른 시디 신 맥주는 애초에 왜 메뉴에서 추천하는지 모를 지경으로 식초맛이 심하게 나서 매우 곤란했다. 그래서 내 텀블러에 다 부어와서 집에서 샐러드 식초로 쓰고 있다. 이 날 공연비는 15,000원이었는데 만오천원의 증폭된 행복감과 “많이 시큼한데 괜찮으시겠어요?”라는 주인의 질문이 머리에 맴돈다. (우리의 실험정신이 가끔 망하기 마련.)




- 5월30일 7:30 GS아트센터> William Kentridge 연출의 Oh To Believe in Another World: Shostakovich 10, 영화 상영과 교향곡 실연, 희라와 함께 관람

곧 6월에 열릴 <체리암, 그 이름에 대하여> 전시 포스터를 그린 김희라 일러스트레이터는 현재 애니메이션 회사에 일하고 물살이 관련 작업도 영상물로 만드는 일을 했기 때문에 독특한 스톱 모션 애니메이션의 세계를 구현하는 윌리엄 켄트리지 작품을 희라에게 보여주고 싶었다. 켄트리지는 남아프리카 공화국 출신 예술 작가로서 정말 다양한 미디어로 활동한다. 나는 아마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전시할 때 처음 작품을 접한 것 같다. 목탄 드로잉의 인상적인 이미지들이 꽤나 강렬했다.
https://brunch.co.kr/@harryjun/10
https://www.mmca.go.kr/exhibitions/exhibitionsDetail.do?exhId=201503310000236
이 공연장 주변은 식당가도 좀 없어보이고 희라가 비건인이라 팥이 도시락 담당하기로 했다. 메뉴는 도라지생강볶음과 현미밥, 김자반, 다양한 피클, 샐러드와 떡.(이 성공한 도라지 레시피도 체리암 사이트에서 공개해야겠다.) 희라는 팥이 너무나 좋아하는 유알티의 뺑오쇼꼴라를 가져옴. 희라 디자이너는 요즘 일하느라 너무 바빠 라면으로 떼우고 살았는데 왠 집밥이냐며 너무 좋아해 뭉클했다.


이번 공연은 <다른 세상을 꿈꿀 수 있었더라면>으로 번역된 제목인데 오케스트라의 교향곡 실연과 함께 영상은 보는 구조였다. Roderick Cox 지휘+서울시립교향악단의 연주. 켄트리지가 쓴 창작 노트에 따르면 “쇼스타코비치 교향곡 10번과 함께할 영상을 만들면서 중요한 과제는 일련의 영상과 이야기들로 음악 자체를 뒤덮어 교향곡을 단순한 영화음악으로 만들지 않을 무언가를 찾는 일이었다.” (지휘자 너무 멋져서 감탄. 이번에는 영상물 보면서 음악 듣느라 제대로 지휘자의 모습을 감상하지 못했는데 언제 기회가 되면 꼭 다시 봐야겠다.)
영상 이미지 참조 https://www.mariangoodman.com/exhibitions/william-kentridge-ny-2023/
이 작품은 1920년대부터 스탈린이 죽고 이 교향곡이 초연된 1950년대에 이르는 40년의 세월을 돌아보는 회고적 시선을 담고 있다. (중략) 영상은 방치된 것처럼 보이는 소이에트 연방의 박물관 내부에서 펼쳐진다. 사실 이 박물관은 작업실의 테이블 위에 판지로 만든 세트이다. (중략) 영상에 들어간 자막의 출처는 다양하지만 대부분 블라디미르 마야콥스키의 희곡과 시에서 따온 것이다. 그는 러시아혁명 직후 소비에트 연방 체제의 열렬한 지지자였다. 하지만 세월이 흐르고 혁명의 희망이 사그러들면서 그는 환멸에 빠졌고 결국 1930년 총으로 생을 마감했다. (중략) 영상은 콜라주 형식을 띤다. 넓게 보아서 역사를 일종의 콜라주로 이해해야 한다는 제안이기도 하다. 예술이라는 매개체는 역사적 사건을 해석하는 방식이기도 하다.
작가의 창작노트(2022) 중 발췌
즉 이 작품에서 다룬 40년의 소련 역사 중 주요 사건은 1917년 러시아 혁명, 1924년 레닌의 죽음, 1930년 마야콥스키의 자살, 1940년 트로츠키 암살, 1953년 스탈린의 죽음이다. 이러한 역사의 흐름 속에서 쇼스타코비치가 소련 정권과 맺게 되는 어려운 관계를 그리며 당시의 어지러운 시대상과 속박을 강조하였다.

쇼스타코비치 교향곡 10번 e단조, 작품번호 93은 이 작곡가를 핍박했던 독재자 스탈린이 세상을 떠난 뒤 처음으로 발표한 교향곡이다. (1953년 12월 17일) 그는 초연 직후 “이 작품에서 나는 인간의 감정과 열정을 묘사하고자 노력했다”고 밝혔다. 작곡가의 다른 교향곡들이 표제적 성격이 강한 반면, 아무런 제목이 없는 이 교향곡은 지금도 여전히 의문을 자아낸다. (리플렛의 김성현 글 인용)

1917년 러시아 10월 혁명 시절의 역사를 모르고 보면 좀 지루할 수 있지만 그 독특한 영상미 덕분에 작품의 완성도가 높아 눈은 쉴 틈이 없다. 무성영화의 형식을 빌어 만들어, 자막이 손글씨 폰트 스타일로 구현되고 화면이 지지직거리는 소리를 낼 것 같아 보인다. 공연 리플렛 설명에 의하면, “그렸다 지우고, 다시 그리기를 반복하면서 생기는 역동성이 특징인 드로잉 기법을 통해 통상적인 애니메이션과 영화에서 한층 더 확장된, 만들어가는 과정에서 여러 의미들을 생성하는 켄트리지 특유의 예술 기법을 정립했다. 여기에 젊은 시절 받았던 연극 교육 경험까지 접목시켜 예술 세계를 한 번 더 확장한다.” 카드보드지로 만든 과장된 무대의상을 입은 연기자들이 그 시절의 주요 인물들(쇼스타코비치 기준으로, 마야콥스키, 나지로바, 브릭, 레닌, 트로츠키, 스탈린)의 얼굴사진을 가면처럼 쓰고 목각인형 같은 춤을 추며 심각한 시대상을 다소 귀여운 느낌의 인형극으로 희화화했다. 그러나 얼굴은 실물 사진을 이용해서 표현하여 결국 역사의 비극을 강조한다. 특히 마야콥스키의 얼굴이 자주 강렬하게 나오는데 이 글의 하단에 이에 대한 정보를 실었다.
아마도 켄트리지는 유대인 인권 변호사였던 부모님의 영향으로(어머니도 인권 변호사이던데 왜 리플렛엔 아버지만 언급?) 남아공의 아파르트헤이트 상황을 잘 알고 있어 인권과 관련된 주제를 자주 자신의 예술세계에서 다룬다. (본인은 정치학, 아프리카학과 출신. 나중에 미술공부) 공연 끝나고 나오면서 20세기초 러시아 상황이 얼핏봐서 우리 현실과 별로 연관이 없을 것 같아도 사실 어이없는 작년 12월초 계엄사태를 생각하면 억압적인 정권의 탄생이 바로 우리 코앞에서 벌어질 뻔한 것이니 꽤나 울림이 있다고 얘기했다. 억압받은 예술가들의 우울한 삶을 처절하게 표현한 장엄한 음악과 함께 기묘한 기분이 드는 영상물이 지나치게 잘 어울려 좀 질리게 하는 면도 있었다. 어떠한 반전이 없어 보여 의외로 밋밋한 면이 있었다. 제목 <다른 세상을 꿈꿀 수 있었더라면>과 달리 작품 안의 주인공들이 살던 시대는 정말 삼엄해서 꿈꾸기가 참으로 어려웠을 것 같다. 어쩌면 그 밋밋한 느낌이 의도된 것인지도? 해소가 안 된 시절이었으니.
이 시대는 팥이 어언 30년 전 입시준비할 때나 짧게 읽고 지나간 역사 내용이고 생소하여 다시 좀 찾아보며 흥미로웠던 자료들을 소개한다.
https://www.munhak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71988
https://blog.naver.com/justinceo/30082169752
https://m.cafe.daum.net/leftcommunist/RtrK/18
이런 비상한 시기에 1905년 4월 12일부터 4월 27일까지 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 제3차 당 대회가 런던에서 개최되었다. 당 대회에서 노동자계급이 전체 농민과 연합하여 부르주아계급을 고립시켜 부르주아민주혁명의 승리를 위해 투쟁하며, 차르 전제체제를 전복시켜 민주공화국을 수립하고 모든 농노제의 잔재를 소멸시킨다는 혁명 1단계 전략이 마련되었다.
이 전략계획에 따라 당 대회는 “노동자계급의 무장봉기를 조직해 전제체제와 직접 투쟁하는 것이 현재 혁명시기에 있어 당의 가장 중요하고 시급한 과제 중 하나”2) 라는 전략방침을 수립했다. 이리하여 ‘무장봉기’를 조직하고 지도하는 것이야말로 이 시기 당의 정치방침의 핵심이 되었으며, 당의 전체 사업은 이 임무를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제1차 러시아혁명과 정치신문> 기사에서 발췌
출처 : 현장언론 민플러스(http://www.minplusnews.com)

검색하다가 알게 된 재밌는 사실은 구.소련의 탄생 배경에 런던이 중요한 배경이 된다는 사실이다. 바로 이 시절에 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 주역들이 차르 시대의 경찰들을 피해 벨기에, 북구, 독일을 도망다니다 거기서도 쫓겨나 런던에서 비밀 회동하였다. 레닌과 스탈린이 주로 런던 동북부 펍 주변에 머물렀다고 한다. 그 쪽 동네가 숙박비가 싸고 여관 주인들이 가난한 유대인들이 많았고 러시아어를 했다고 한다. 그 중 The Crown Tavern(Clerkenwell Green 동네), The Crown and Woolpack(Angel 동네, 지금은 폐업), The Three Johns (Islington 동네)에서 주로 모였고 마지막 더쓰리죤스 펍에서 그 유명한 볼셰비키(다수파)/멘셰비키(소수파)로 당이 나뉘어졌던 것이다. 나중에 레닌이 이끄는 볼셰비키가 10월 혁명을 성공시킨다.
https://www.standard.co.uk/showbiz/celebrity-news/stalins-east-end-738
https://www.bbc.com/news/uk-politics-41629394
https://helenrappaport.com/footnotes/lenin-in-london/
https://www.telegraph.co.uk/travel/destinations/europe/united-kingdom/england/london/articles/the-russian-revolution
런던에 돌아다닐 때 이 사실을 알았다면 재밌었을 텐데 뒷북이네.
그리고 공연에서 제일 얼굴이 자주 나온 강렬한 눈빛의 마야콥스키에 대해 찾아보니 자살로 요절한 아방가르드 시인이자 혁명 시인. 부르주아를 질타하는 그의 글이 공연 자막으로 주로 쓰였고 그는 쇼스타코비치의 친구이다. 마야콥스키가 쓴 디스토피아적인 정치풍자 희극 <빈대>(The Bedbug op.19, 1929)의 음악 작업도 함께 하였다.
*시인 블라디미르 마야콥스키(1893-1930)의 시집 번역본, 민음사 소개 문구: 시라는 예술을 송두리째 바꿔 버린 혁명의 시인, 블라디미르 마야콥스키 대표 시선집 [세계시인선59] 바이올린과 약간의 신경과민 (조규연 번역)

시와 희곡, 그림을 남겼으며, 미래주의 선언문을 발표하며 온몸으로 혁명의 시대를 살았던 예술가. 1893년 7월 19일 조지아에서 삼림관의 아들로 태어났다. 1906년 열세 살에 아버지를 잃고 생계를 위해 모스크바로 이주해야 했다. 당시의 궁핍하고 열악한 삶은 그에게 마르크스주의와 혁명에 대한 관심을 강하게 불어넣었다. 1908~1909년 사회주의 선전 활동과 세 차례의 수감 생활을 겪으며 그의 내면에 예술가적 정체성과 정치적 사회주의라는 극단이 혼재되는데, 이는 시인의 창작 전반에 걸쳐 지속적인 딜레마이자 갈등으로 작용했다.
1911년 미술 학교에서 만난 동료들과 교류하며 미래주의를 접하고, 1912년 시로 등단하여 다채로운 형식을 통해 미래주의 문예 운동에 적극 가담한다. 1917년 10월 혁명을 기점으로 그의 창작 세계에서 정치 혁명은 예술 혁명과 하나로 자리 잡지만, 이후 1920년대 이어진 선전 선동의 시 창작과 국가 주도의 포스터, 광고 작업은 시인을 지치게 만들었다. 당과의 불화로 인한 정치적 고립과 예술가로서의 존재론적 위기 사이에서 방황하던 시인은 1930년 4월 14일, 권총 자살로 서른일곱 해의 짧은 생을 마감했다.
“인간으로 살았고 시인으로 죽었다.”―마리나 츠베타예바
“나는 말의 위력을 안다.” ―블라디미르 마야콥스키
“마야콥스키의 ‘한계 체험’은 삶과 미학을 구별하지 않고 정치적 유토피아를 향해 나아간다. 그것은 경계를 넘어 모종의 끝까지 가려는 자를, 정말로 고독의 끝까지 밀고 가 버린다.” ― 이장욱(시인)민음사, 시집 소개 페이지
석영중 교수 글 https://www.donga.com/news/Opinion/article/all/20211008/109607673/1
마야콥스키의 1926년 시 <세무원과 시에 대해 이야기하다>가 1963년 Poetry잡지에 영문본으로 실림 https://www.poetryfoundation.org/poetrymagazine/browse?volume=102&issue=2&page=34
같은 시 https://www.tumblr.com/crimson-compass?source=share
제목이 너무 기발하다! 이상 5월 공연 메모장은 3부작으로 끝.
팥.

